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은퇴 연령(정년)을 2년 연장하는 연금 개혁안을 하원 표결 없이 정부가 단독으로 입법하는 초강수(超强手)를 선택, 프랑스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야당과 노동 단체들은 “국민과 의회를 무시하는 반민주적 행태”라며 격렬한 저항을 예고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16일(현지 시각) 수도 파리에서 열린 국가 외교 원탁회의에 참석해 두 손을 모으고 참석자의 발언을 듣고 있다. 이날 프랑스 정부는 하원 표결을 건너뛰고 헌법 49조 3항을 발동해 연금 개혁 법안을 관철하기로 했다. 프랑스 헌법 49조 3항은 정부가 긴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했을 때 각료 회의를 통과한 법안을 의회 표결 없이 통과시킬 수 있게 한 특별 조항이다./AFP 연합뉴스

엘리자베트 보른 프랑스 국무총리는 16일 오후 3시(현지 시각) 연금 개혁 법안 표결을 앞둔 하원에 출석, “헌법 49조 3항에 의거한 연금 개혁 법안을 처리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날 오전 프랑스 상원은 연금 개혁안을 찬성 193, 반대 114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오후 하원 표결에서 법안 통과가 힘들 것이란 예상이 나오자, 표결 없이 법안 처리가 가능한 헌법 49조 3항이 발동됐다.

마크롱 대통령은 표결 직전 대통령궁에서 열린 국무위원들과의 회의에서 “나는 (연금 개혁안을 하원) 표결에 부치고 싶었지만, (부결될 경우) 재정적, 경제적 위험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마크롱 대통령과 집권 여당 르네상스는 당초 연금 개혁에 우호적인 공화당(LR)과 손잡고 연금 개혁법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려 했다. 범여권의 의석은 250석에 불과하지만, 공화당의 61석을 더하면 최대 311석으로 과반인 289석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상원에선 기대대로 공화당 의원들이 대거 찬성표를 던졌다. 하지만 공화당 하원 의원들은 이날 “국민 여론에 반한다”며 잇따라 당론 거부 의사를 드러내 정부와 여당에 불안을 안겼다. 이달 초 여론조사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의 약 70%가 연금 개혁에 반대하고 있다. 일간 피가로는 “상당수 공화당 의원들이 이탈할 것이란 소식이 전해지면서 마크롱 대통령이 직접 49조 3항 발동을 결정했다”고 전했다.

현재 62세인 프랑스의 정년은 같은 유럽 국가인 스페인(65세), 독일(65세 7개월), 그리스(67세) 등과 비교해 매우 이르다. 기대 수명 증가에도 이른 은퇴가 고집되면서 국가 재정에 미치는 연금 부담은 점점 커지고 있다. 프랑스 재정경제부는 “현행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 2030년 연금 적자가 연간 135억유로(약 19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따라서 “연금 재정이 더 나빠지기 전에 파국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입장이다. 보른 총리도 이날 의회에서 “은퇴자들의 미래를 놓고 도박을 할 수 없다”며 “오늘의 결정은 불가피했다”고 밝혔다. 연금 개혁이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법 통과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동계 철로 점거 시위 - 17일(현지 시각)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의 한 기차역에서 강경파 노동총동맹(CGT)과 철도 노조원 등 시위대가 선로를 점거하고 연금 개혁안에 항의하고 있다. 이날 프랑스 정부가 하원 표결을 건너뛰고 헌법 49조 3항을 발동해 연금 개혁 법안을 관철하기로 하면서 파리·마르세유·낭트 등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AFP 연합뉴스

연금 개혁 법안에 반대해온 극우 성향 국민연합(RN)과 극좌 신민중생태사회연합(NUPES·뉘프) 등 야당은 “반(反)민주적 폭거”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야당 의원들은 보른 총리가 의회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야유를 퍼부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야당 의원들이 프랑스 국가(라마르세예즈)를 너무 크게 불러 보른 총리의 발언이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고 보도했다. 내부 반발도 나오고 있다. 여당 르네상스의 에리크 보토렐 의원은 “나는 실망과 분노 사이를 오가고 있다”며 “우리는 하원에서 투표해야 했다”고 말했다. 에리크 시오티 공화당 대표도 “정부의 이번 결정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잘못됐다”며 “민주주의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간 르몽드 등 프랑스 매체들은 “야당과 타협에 실패한 마크롱 대통령이 위기 상황에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고 평가했다. 표심에 민감한 의회에 맡겨선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연금 개혁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봤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크롱 대통령이 프랑스 정국에 ‘핵 발사’ 버튼을 눌렀다”며 그가 남은 임기 내내 의회와 심각한 불화를 겪으며 ‘레임덕’에 빠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블룸버그는 “마크롱 대통령이 인기 없는 정책을 밀어붙이다 적대적 입법 환경을 만들었다”며 “향후 이민과 고용 개혁 등 다른 공약의 실현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야당은 정부의 연금 개혁 법안의 단독 입법을 무산시키기 위해 국무총리 이하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프랑스 헌법은 정부가 49조 3항을 발동한 이후 24시간 내에 의회가 내각 불신임안을 내면 정부의 단독 입법을 불신임 투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중단토록 하고 있다. 내각 불신임안 투표는 오는 20일 진행될 전망이다. 만약 불신임 투표에서 하원 577명 중 과반인 289명 이상이 찬성하면 보른 총리 등 내각은 총사퇴하고, 연금 개혁 법안도 자동으로 폐기된다. 프랑스 언론 매체들은 “하지만 범여권(250석)과 공화당(61석)이 불신임안에 반대하고 있어 가결 가능성은 낮다”고 전했다. 불신임안이 부결되면 이르면 이달 중 연금 개혁 법안이 공포될 수 있다.

프랑스 노동계는 ‘초강력 대응’을 공언하고 나섰다. 이날 정부의 49조 3항 발동 소식이 전해지자 파리 시내 콩코르드 광장과 마르세유, 낭트 등에서 6만여 명이 몰려나와 시위를 벌였다. 파리에선 성난 노조 조합원들이 길거리에 쌓인 쓰레기에 불을 질렀고, 경찰은 시위대에 최루가스와 물대포로 대응했다. 마르세유에선 시위대가 건물에 페인트를 뿌리고 상점을 약탈하기도 했다. 경찰은 파리에서 258명 등 프랑스 전역에서 310명을 체포했다. 필리프 마르티네즈 노동총동맹(CGT) 위원장은 “마크롱 정부가 프랑스 국민에 대한 경멸을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노동단체 대표들은 긴급 회동을 갖고 23일 연금 개혁안 반대 9차 파업 및 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