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9월 28일 저녁 ‘대일 청구권 포기’를 핵심으로 하는 중·일공동성명 발표를 하루 앞두고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마오타이주로 축배를 나누는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오른쪽). photo 뉴시스

우리 정부가 지난 3월 6일 발표한 ‘일제 강제징용 대위변제’ 방안을 놓고 제3자인 중국 측의 비난이 거세다. 이른바 ‘대위변제’ 방안은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촉발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측 배상의무를 한국 측에서 대신 부담하겠다는 방안이다.

박정희 정부 때인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한·일기본조약)와 함께 체결된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한·일 간의 청구권 문제가 일괄적으로 타결된 만큼, 일본에 또다시 “돈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윤석열 정부가 그간 한·일 관계에 발목을 잡아온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전향적 입장을 밝히면서 한·일 양국은 급속히 가까워지는 모양새다.

윤석열 대통령은 3월 16일과 17일 김건희 여사와 함께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와 한·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한국 대통령이 일본을 찾아 일본 총리와 양자 정상회담을 가진 것은 2011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방일 이후 12년 만이다. 이 밖에 한·일 양국은 한국과 일본의 미래청년세대들을 위해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 주도로 ‘미래파트너십기금’이라는 공동 기금도 조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중 관영매체, ‘굴욕외교’ 한국 비난

한때 ‘죽창가’가 난무했던 한·일 관계가 급속히 개선될 조짐을 보이자, 중국 측은 관영매체를 통해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지난 3월 6일 박진 외교부 장관이 ‘대위변제’ 방안을 공식 발표한 직후 ‘일본과 친해져 미국에 아첨한다’는 뜻의 ‘친일미미(親日媚美)’라는 말을 써가며 한국 정부를 비난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와 관영 중국중앙방송(CCTV) 역시 각각 ‘역사배반’ ‘역사후퇴’ ‘굴욕협의’와 같은 말을 써가며 야당인 더불어민주당과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등 좌파인사들의 말을 인용해 한국 정부의 결정을 비난하고 나섰다.

중국 관영 매체들의 이 같은 보도태도는 중국 정부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중국 외교부 마오닝(毛寧) 대변인은 지난 3월 6일 한국이 ‘대위변제’ 방안을 발표한 당일 정례브리핑에서 “강제노역은 일본 군국주의가 대외침략과 식민통치기간 중국과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 국가 인민들에게 범한 엄중한 인도적 범죄”라며 “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산과 같이 굳건한 증거가 있고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울러 “중국 측은 일본 정부 측에 성실하고 책임 있는 태도로 적절히 처리하기를 요구해 왔다”며 “이를 위해서는 일본이 역사를 직시하고 깊이 반성하고 실제 행동으로 역사적 죄상을 참회해야 한다”고 한·일 양국을 동시 겨냥했다.

하지만 상당수 전문가들은 중국의 이 같은 성토가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지적을 한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청구권을 행사한 한국과 달리, 중국은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 때 “일본 인민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전쟁배상금’ 청구를 포기한 바 있어서다. 자연히 “스스로 대일 청구권 행사를 포기한 중국이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와 함께 이미 청구권을 행사한 한국 측에 강제징용 청구권 행사를 포기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내로남불”이라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중국은 1972년 9월 29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중국 총리와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일본 총리가 만나 발표한 ‘중·일공동성명’ 제5조에서 “중·일 양국 인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국에 대한 전쟁배상 요구를 포기한다”는 문구를 명시했다. 중국은 다나카 총리 방중에 두 달 앞선 1972년 7월 대중특사로 방중한 다케이리 요시카츠(竹入義勝) 공명당 위원장에게 이미 ‘청구권 포기’ 의사를 전달한 터였다.

이러한 결정은 이른바 ‘다케이리 메모’에 등장하는데, 전쟁배상금을 청구하면 막대한 부담이 일본의 청년세대에 주어지고 장기적으로 중·일 관계에 걸림돌이 된다는 마오쩌둥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청나라 말인 1900년(경자년) ‘의화단의 난’ 때 일본을 포함한 ‘8국 연합군’에 이른바 ‘경자년(庚子年) 배상’을 해봤는데, 결국 배상금 마련에 따른 부담은 모두 백성들의 부담이라는 것이 마오쩌둥의 판단이었다. 이 같은 결정을 두고 중국공산당은 “마오 주석의 통 큰 결정”이라고 칭송해 왔다.

1972년 9월 29일 ‘중·일공동성명’ 발표 직후 베이징 중난하이에서 마오쩌둥과 만난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오른쪽). 왼쪽은 마오와의 만남을 주선한 저우언라이 총리. photo 바이두

‘마오의 통 큰 결정’으로 배상요구 포기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중국이 중·일 간 국교정상화를 단행하면서 일본의 대만과의 단교를 종용하기 위해 자국민들의 막대한 청구권을 희생시켰다는 비난 역시 엄연히 존재한다. 중·일전쟁 기간 동안 사망한 중국인만 최소 10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에 따라 중국은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를 단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청구권을 행사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중국은 1951년 미국을 위시한 48개국 연합국과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했을 때나, 1952년 중화민국(대만)이 일본과 ‘중·일화평조약(타이베이조약)’을 체결했을 당시 대일 청구권을 포기하자 이를 맹렬히 비난한 바 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태평양전쟁을 공식 종료하기 위해 미국 등 48개 연합국과 패전국인 일본 사이에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한 ‘종전조약’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14조는 “연합국은 본 조약의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연합국의 모든 배상청구권과, 전쟁 수행 과정에서 일본 및 그 국민이 자행한 어떤 행동으로부터 발생된 연합국 및 그 국민의 다른 청구권, 그리고 점령에 따른 직접적인 군사적 비용에 관한 연합국의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1952년 4월 28일 대만과 일본이 타이베이의 옛 대만총독 관저인 ‘타이베이빈관(臺北賓館)’에서 체결한 ‘중·일화평조약(중·일화약)’ 역시 제11조에서 “중화민국(대만)과 일본이 전쟁상태의 결과 또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관련 규정에 의거해 처리한다”고 명시했다. 그 아래 의정서 ‘제1조’에서는 “일본 인민에게 관용과 우호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중화민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14조’에서 일본이 응당 제공해야 할 서비스에 대한 이익을 자동 포기한다”고 규정해 ‘청구권 포기’를 못박았다.

대만도 1952년 ‘대일 청구권’ 포기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중화민국(대만)은 태평양전쟁 때 일본과 맞서 싸운 승전국이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 중 하나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때도 초대받았다. 반면 당시 중국은 비록 1949년 국공(國共)내전에서 승리해 중국 본토를 차지하고 있다 해도 유엔 미승인 정권으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에 초대받지 못했다. 이에 대만섬에 있는 장제스 정권이 전체 중국을 대표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중·일화약’을 연이어 체결하고, 일본에 대한 청구권을 스스로 포기해버리자 중국이 이를 강력히 성토한 것이다.

대만섬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 청나라 리훙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체결한시모노세키조약 때 부터다. 대만이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 있었던 기간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으로 한반도가 일제 식민지였던 기간(35년)보다 15년이나 더 길다.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따른 청구권을 주장할 경우, 한국보다 훨씬 더 많은 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초대받지 못한 한국과 달리 샌프란시스코 조약상 명백한 승전국 지위에 있었던 대만은 청구권을 주장할 근거도 차고 넘쳤다. 중·일전쟁의 주 전장이 중국 본토였기 때문에 중국의 청구권이 최소 500억달러에 달한다는 추산도 있었다.

대만 장제스 정권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중·일화약을 연이어 체결하며 최소 500억달러로 추산되는 청구권을 선심쓰듯 포기해 버리자, 1955년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 겸 외교부장은 “중국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중·일화약을 절대 반대한다”며 “장제스의 배상요구 포기 약속은 남의 재물로 생색내는 것”이라고 강력히 성토했다. 일본에 대한 청구권 포기를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중국 측의 기존 입장이었다.

마오, “장제스 포기했으니 나도 포기”

하지만 이 같은 중국의 입장은 1972년 중·소 분쟁 와중에 중국의 입장이 다급해지면서 극적으로 바뀌었다. 마오쩌둥은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 때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와 만나 “장제스가 통 크게 (청구권을) 포기했으니 나도 포기하겠다”고 입장을 바꾸었다. 1952년 대만과 일본의 중·일화약 체결 때 청구권 포기를 성토했던 저우언라이도 “중국공산당의 도량이 장제스보다 작을 수 있느냐”며 청구권 관련 기존 입장을 180도 바꾸었다. 아울러 저우언라이는 “배상청구를 하면 그 부담이 최종적으로 일본 인민에게 돌아간다”며 “이는 일본 인민과 대대에 걸쳐 우호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중국의 염원에 위배된다”며 청구권 포기의 정당성을 오히려 강변했다.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으로 ‘닉슨 쇼크’에 빠져있던 일본이 미국(1979)보다 7년이나 앞서 중국과 수교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 측의 ‘청구권 포기’가 결정적이었다는 평가다. 대신 중국은 ‘중·일공동성명’ 제2조에 “일본은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을 중국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한다”는 문구를 삽입하는 것을 관철시켰다. 대만의 최대 우방 중 하나인 일본을 대만과 단교시켜 장제스 정권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당시 일본이 대만과 단교하자 격분한 대만 당국은 1952년 중·일화약 당시 포기했던 대일 청구권을 다시 행사하려고 했지만 결국 불발됐다. 반면 한국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의 청구권을 못박았다. 일본을 상대로 청구권을 행사하고 실질적 배상을 받아냈다.

중국 역시 겉으로는 ‘청구권 포기’를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공적개발원조(ODA)를 일본으로부터 받아내는 ‘남는’ 장사를 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덩샤오핑 집권 때인 1979년부터 1995년까지 중국이 받아간 일본의 대중(對中) 차관은 97억달러로 중국 전체 차관의 40%가 넘는다. 한 전직 외교관은 “중국은 언제나 통 크게 양보하는 척하면서 챙길 것은 다 챙긴다”며 “우리 정부도 이런 점은 좀 배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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