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주기 끊겠다” 전동톱 유세 - 19일(현지 시각)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자유의 전진’ 소속 하비에르 밀레이 후보가 좌파 집권당 후보를 꺾고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사진은 밀레이 당선인이 지난 9월 선거 유세 때 전동 톱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며 정부 지출을 대폭 줄이겠다고 공약하는 장면이다. 그는 아르헨티나를 경제 위기에 빠뜨린 수십 년간의 ‘퍼주기 복지’를 잘라내 만성 재정 적자를 해소하겠다고 밝혀왔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아웃사이더’로 분류됐던 하비에르 밀레이(53) 하원의원이 집권 중인 좌파 페로니즘(대중 영합주의) 후보를 누르고 19일(현지 시각) 승리했다. 수십 년 이어진 페로니즘 정권의 무리한 돈 풀기에 따른 극심한 경제난에 지친 민심이 결국 급격한 변화를 선택했다는 분석이다. 보조금 증액, 감세, 돈 찍어내기 등 페로니즘 정부의 ‘퍼주기 정책’으로 통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아르헨티나는 물가 상승률이 140%(전년 대비, 지난달 기준)를 넘어서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려 왔다. 밀레이는 다음 달 10일 취임한다.

밀레이는 중앙은행 폐지, 공용 화폐로 미 달러화 채택, 총기 자유화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정치 경험이 거의 없는 밀레이가 내건 정책이 극단적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한편 이전 정부와 달리 친미·반중 노선을 내세운다는 점을 들어 뉴욕타임스·CNN·BBC 등 서방 언론은 그를 ‘극우 아웃사이더(far-right outsider)’라고 평가하고 있다. 정부 지출을 줄이겠다며 전동 톱을 들고 유세하고, 취약 계층을 위한 과세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 출신인 교황을 “더러운 좌파”라고 비난하는 등 과격한 언사를 서슴지 않는다는 특징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연상케 해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란 별명도 있다.

19일(현지 시각)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날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하비에르 밀레이 하원의원이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이날 개표가 99.3% 진행된 가운데 ‘자유의 전진’ 소속 밀레이는 55.7%를 득표해 44.3%를 얻은 여당 ‘조국을 위한 연합’ 후보 세르히오 마사 경제장관을 예상보다 큰 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밀레이는 당선 직후 연설에서 “(집권 페로니스트들이) 초인플레이션으로 향하는 파괴된 경제를 우리에게 남겨뒀다”면서 “이제 빈곤한 모델을 끝내고 35년 후에는 아르헨티나가 세계 강국이 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날 당선으로 밀레이는 1983년 아르헨티나 민주화 이후 사상 두 번째 비(非)페로니스트 대통령이 됐다. 2015년 당선된 중도 우파 마우리시오 마크리 전 대통령은 페론당 후보를 2.7%포인트 차로 간신히 누르고 당선된 바 있다. 현지 매체 라나시온은 “페로니즘에 지친 아르헨티나 국민이 대안을 선택했다”고 전했다.

아르헨티나 국민은 당장 ‘지갑’에 돈이 꽂히는 포퓰리즘이 일으킨 물가·금리 폭등 등에 따른 민생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밀레이의 손을 일단 들어줬다. 2019년 페로니즘을 내세워 당선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현 대통령은 지속 불가능한 공공 부문의 보조금과 각종 복지 혜택을 남발하면서 4년간 국가 부채를 962억2600만달러(약 124조원) 늘렸다. 그 적자를 정부가 통제하는 중앙은행의 ‘돈 찍어 풀기’로 막은 탓에 집권 4년간 시중에 풀린 통화량은 4배 넘게 증가했다.

19일(현지 시각) 아르헨티나 대선 결선 투표에서 승리한 하비에르 밀레이 당선인이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정권 교체를 축하하는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 뉴스1

그 결과 아르헨티나 통화(페소화) 가치는 같은 기간 90% 이상 하락했고, 연간 물가 상승률은 지난 3월 100%를 넘어선 후 계속 올라 지난달엔 143%까지 치솟았다. 현 정부 집권 기간 중 물가 상승률은 844%에 이른다. 이는 정부가 각종 공공 요금을 동결하고 기업을 압박해 국민이 가장 많이 소비하는 생필품 약 2000종에 ‘공정 가격’이란 이름을 붙여 인위적으로 찍어 눌렀음에도 집계된 수치다. 한 아르헨티나 주재원은 “아르헨티나에선 ‘오늘이 가장 싸다’는 말을 흔히 쓴다. 월급이 들어오면 생활필수품부터 사두는 이가 많다”고 했다. 아르헨티나 기준금리는 연 133%나 된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보유한 외환은 211억달러(약 27조원)로 4년간 반 토막이 났는데, 전문가들은 각종 차입금을 제외할 경우 보유 외환이 사실상 ‘마이너스’라고 보고 있다. ‘통장’이 바닥난 정부가 범죄·빈곤 퇴치 정책 등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해 아르헨티나 빈곤율은 지난 4년간 35%에서 40%로 올라갔다. 범죄율 또한 상승했고 최근 1~2년 사이엔 마약 매매가 횡행하는 등 치안도 악화했다.

그래픽=김현국

밀레이는 이전 정부가 과도한 보조금과 복지 혜택을 남발해 경제난이 닥쳤다며 대안으로 ‘최소 정부’를 지향하는 정책을 들고나왔다. 또 독립적 통화 정책을 펼치지 못하고 정권 의지에 따라 휘둘려온 중앙은행을 폐지하고 자국 통화인 페소 대신 미국 달러화를 채택하겠다고 공약했다. 현실 가능성이 떨어지는 일부 공약에도, 밀레이는 결국 반(反)페로니즘을 무기로 내걸어 대선에서 최종 승리했다. NYT는 “아르헨티나 국민은 밀레이의 과격한 정책을 지지한다기보다 현 정권에 대한 밀레이의 분노에 공감해 그에게 표를 주었다”고 전했다.

앞서 지난달 실시한 본선 투표에서 밀레이는 여당 후보인 마사(37%)에게 뒤진 2위(30%)를 기록해 밀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후 중도 우파 제1 야당 ‘변화를 위해 함께’ 후보로 나서 3위(24%)로 탈락한 파트리시아 불리치와 마크리 전 대통령의 지지를 얻어냈고 결국 반페로니즘을 축으로 중도 우파 유권자 상당수를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마사는 현직 경제장관이라는 ‘집권 프리미엄’을 활용해, 당선되면 돈을 더 풀고 가격을 통제해 물가를 잡겠다며 대중을 유혹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선거 기간인 두 달간 비정규직 근로자에게 보너스를 살포하고 대다수 근로자의 소득세를 감면하는 등 막바지 돈 풀기에 열중했다. 그러나 결국 민심 잡기에 실패해 낙선했다.

아르헨티나에 친미 우파 정권이 들어서면 외교 노선도 급격한 변화를 맞을 전망이다. ‘친미 반중’을 지향하는 밀레이는 “미국 등 자유주의 세력과 대화하고 중국·러시아·북한 같은 공산주의자들과는 교류하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이에 아르헨티나 내에서 진행되는 중국의 기반 시설 투자 사업 등이 차질을 빚을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이 지정학적 목적으로 노려온 남미 최남단 우수아이아 지역의 항구 건설·운영도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페로니즘(Peronism)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전 대통령(1946~ 1955·1973~1974 재임)이 주창했던 대중 영합적 경제·사회 정책. 복지 확대와 임금 인상, 외국 자본 배제, 철도·항만 국유화 등을 추구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중남미 다수 국가에 비슷한 정책 노선을 표방한 정권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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