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러시아 미사일 폭격에 파괴된 우크라이나 오데사 성당의 지난달 말 모습. 우크라이나 최대 항구 도시 오데사 중심부에 있는 이 성당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오데사=김신영 기자

흑해에 면한 우크라이나 최대 항구 도시 오데사엔 세계적으로 이름난 ‘포템킨 계단’이 있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감독의 고전 영화 ‘전함 포템킨(1925년)’ 주요 장면에 등장해 유명해진 이 계단은 한때 관광객으로 붐볐지만, 지난달 말 찾았을 땐 가림막이 쳐지고 사진 촬영도 금지된 상태였다. 우크라이나 최대 수출항(港)으로 러시아가 시도 때도 없이 미사일과 드론으로 공격해와 전략적 보호 시설이 된 오데사항이 계단 위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오데사가 러시아에 점령당한 적은 없다. 하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주요 경제 동력인 곡물 수출을 차단하려 오데사항을 무력화시키고 궁극적으론 손에 넣기 위한 도발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날 찾아간 오데사항 옛 무역 터미널은 창문이 모두 부서져 싸늘한 겨울바람만 매섭게 오가고 있었다. 주변 건물도 곳곳이 파괴돼 안팎 구분이 되지 않는 지경이었다. 러시아는 지난 7월 마지막 주 한 주 동안에만 미사일 및 드론 폭탄 125발로 오데사 무역항을 폭격했다. 전쟁 이후 흑해 항로가 막혀 곡물 가격이 치솟자 흑해의 우크라이나 항구를 통한 곡물 수출을 허용키로 했던 우크라이나·러시아·유엔·튀르키예 간 곡물 협정을 러시아가 사실상 탈퇴한 지 나흘 만에 폭격이 시작됐다.

그래픽=김현국

오데사항은 러시아가 2014년 강제로 합병한 크림반도 북부에서 약 200㎞ 떨어져 있다. 지대지(地對地) 미사일로 타격이 가능하다. 최근엔 폭발물을 탑재한 드론 공격도 늘었다. 드미트로 바리노프 오데사항 부대표는 “시(市)에 미사일 방어 시스템이 있긴 했지만 러시아가 워낙 많이 미사일을 쏘아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오데사항은 전쟁 발발 후 운항을 중단했던 여객항을 무역항으로 개조하는 등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곡물 수출을 곧바로 재개했다. 이후 최대한 우크라이나 영토에 붙어 항해하도록 하는 ‘인도주의 항로’를 만들어 수출을 이어가고 있다.

오데사항의 곡물 수출이 중단되면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전 세계가 타격을 입게 된다. 우크라이나는 세계 해바라기씨유 수출의 46%, 보리와 밀 수출의 17%, 9%를 차지하는 주요 곡물 공급처다. 러시아의 봉쇄로 바닷길이 제한된 데 이어 전쟁으로 인한 농지와 농업 인력 감소로 우크라이나 농산물 생산은 전쟁 전보다 30% 정도 줄었다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추정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곡물 수입 의존도가 높은 아프리카 저개발국 등엔 우크라이나 농업과 무역항의 차질이 식량 안보를 위협하는 치명적 변수가 된다.

폭격 맞은 오데사 호텔 - 지난달 말 우크라이나 최대 수출항(港)인 오데사항의 옛 무역 터미널과 연결된 호텔 외벽과 유리 등 건물 전체가 러시아의 폭격으로 크게 파괴된 채 남아 있다. /오데사항

곡물 협정 탈퇴 후 러시아가 바다에 뿌리는 기뢰(機雷)도 곡물의 뱃길을 전장(戰場)으로 만드는 불안 요소다. 바리노프 부대표는 “러시아가 뿌린 수많은 기뢰가 바닷가로 쓸려와 민간인의 안전까지 위협하고 있다. 이들 기뢰가 해류를 타고 불가리아·루마니아까지 흘러드는 판”이라고 했다.

지난 10월 말에도 러시아가 대형 수리 조선소를 미사일로 폭격해 두 명이 다치는 등 ‘알짜 항구 오데사’를 탐내는 러시아의 도발은 끊이지 않고 있다. 수도 키이우는 하루 한두 번 공습경보가 발령되는 정도지만, 오데사에선 하루 열 번 넘게 사이렌이 울렸다. 공습경보가 일상이 된 주민들은 지친 걸음을 끌고 방공호로 들어가거나,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곤 무심한 듯 가던 길을 계속 가거나 했다.

러시아는 지난 7월 연쇄 폭격을 하면서 항구뿐 아니라 주민들의 정신적 버팀목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오데사 성당(‘거듭남 성당’)에도 미사일을 발사해 파괴했다. 지난달 29일 찾은 성당은 미사일이 관통한 길 그대로, 대각선으로 구멍이 나 부서져 있었다. 성화(聖畵)가 그려졌던 벽은 미사일에 산산조각이 나 과자처럼 바스라졌다. 미사일이 예배당 바닥을 뚫고 들어가며 만든 거대한 구멍 아래론 파괴된 지하가 동굴처럼 들여다보였다. 오데사 주민들은 찬 바람이 들어오는데도 성당을 찾아 기도를 올리거나 홀로 조용히 찬송가를 불렀다. 러시아 공격 위험으로 다수가 모이는 예배 등의 행사가 금지돼 조촐한 개인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지난달 29일(현지 시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오데사 성당 모습. 지난 7월 러시아의 폭격으로 내부 구조물이 심하게 훼손됐다./오데사=김신영 기자

오데사 성당 밀라슬라우 신부는 “폭발로 교회의 창문이 전부 부서지고 모든 문이 날아가고, 성당에 있던 그림의 60%가 파괴됐다”고 했다. “이 성당은 도시 한가운데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보호받는 곳입니다. 전투 시설은 당연히 없고 성당엔 기도하려는 신자들만 모입니다. 신성한 성당까지 폭격하는 러시아의 행위는 세계의 룰(rule·법칙)을 완전히 무시하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데사 등 흑해 항구 도시들에선 ‘세계의 빵 바구니’라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이 러시아의 침공으로 얼마나 위태로운지, 또 우크라이나 경제의 척추 격인 곡물 수출을 지켜내기 위해 정부와 국민이 얼마나 온 힘을 다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었다. 오데사에서 약 100㎞ 떨어진, 또 다른 흑해의 항구도시 미콜라이우도 생존을 위해 고전(苦戰)하긴 마찬가지였다. 이 항구는 우크라이나 최대 농산물 기업으로 자체 함대와 조선소까지 보유한 ‘니불론’이 하루 24시간 운영해 세계 각지의 선원들로 붐볐던 곳이다. 하지만 전면전 발발 이후 아예 배가 들고나지 못하고 있다. 미콜라이우에서 흑해로 나가려면 러시아 점령지(2014년 점령)인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있는 드니프로우스카만(灣)을 지나야 하지만, 전쟁 발발 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나오는 배는 국적을 불문하고 공격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 우크라이나 남부 미콜라이우에서 농산물 회사 '니불론'이 운영하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화물선.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흑해로 나가는 배들을 폭격하겠다고 공격하면서 1년 10개월째 항구에 묶여 있다. /볼로디미르 케펠(PIJL)

지난달 말 찾은 미콜라이우 항구엔 튀르키예 깃발을 휘날리는 거대한 컨테이너선이 정박한 모습이 보였다. 전쟁 발발 후 거의 2년이 다되도록 이 항구에 묶인 배다. 러시아의 갑작스러운 해협 봉쇄로 이 항구엔 배 35척이 고립된 상태로 방치돼 있다. 밤낮없이 왁자했다는 항구 내 선술집은 자물쇠가 채워진 채 텅 비어 있었다. 니불론 직원을 빼면 항구엔 비둘기 떼뿐이었다.

러시아가 바닷길을 막은 후 니불론은 곡물을 트럭에 실어 110㎞ 거리인 오데사항까지 날라 수출하고 있다. 무역선을 건조(建造)하던 조선소는 기뢰 제거선을 만들어 국방부에 공급하고 있다고 한다. 안드리 바다투르스키 니불론 CEO는 “러시아는 항구를 막고 농지에 지뢰를 뿌리고 점령지 농지를 폐허로 만듦으로써 막대한 피해를 사기업인 우리 회사에 끼치고 있다”며 “지금까지 파악된 손해 규모만 4억달러(약 5200억원)로,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러시아 정부에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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