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월 1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레이머트 공원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배우 지망생 엘리자베스 쇼트(당시 23세)/psychologytoday.com


잔혹하고 끔찍한 살해를 저지른 후 감쪽같이 사라진 범인들. 수십 년 전 일어났지만 아직까지도 진범을 잡지 못한 장기 미제사건들이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사건 발생 당시보다 수사력이 발전한 오늘날에도 범인의 생존여부조차 알 수 없는 오리무중 상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 사건들의 면면을 재조명해본다. /편집자주

※ 이 기사에는 잔혹한 범죄 상황 묘사가 포함돼 있습니다.

1947년 1월 15일 오전 10시 30분쯤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레이머트 공원을 산책하던 한 주부가 길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여성 시신을 발견했다. 처음 보고 그는 “마네킹인 줄 알았다”고 한다. 시신은 입이 양쪽 귀까지 찢어진 채, 허리가 잘려 두 동강이 나 있는 등 잔혹한 모습으로 살해당해 있었다. 팔꿈치를 직각으로 세운 항복 자세에 다리는 펼쳐진 ‘X’자 모습이었다. 비현실적이게도 몸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시신의 주인공은 당시 23세였던 배우 지망생 엘리자베스 쇼트였다. 1924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난 그는 사망 무렵 배우 활동을 준비하면서 2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이었던 공군 장교 남자친구와 약혼 상태였다고 한다. 화려한 할리우드 생활에 미처 발도 들여보지 못하고, 꿈꾸던 결혼 반지도 끼워보지 못한 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사망하기 직전 그는 LA 할리우드대로의 월세 방에 살며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었다.

쇼트의 유기된 시신이 ‘엽기 행각’에 가까울 정도로 훼손돼 있던 탓에 사건은  큰 관심 대상이 됐다. 언론사 ‘헤럴드 익스프레스’는 쇼트가 생전 검은 옷을 즐겨 입었다는 점에서, 한해 전 개봉한 미국 영화 ‘블루 달리아’의 이름을 차용해 그를 ‘블랙 달리아(Black Dahlia)’라고 불렀다. 달리아는 국화과 꽃의 일종이다.

미 경찰들은 쇼트가 주검으로 발견되기 일주일 전쯤 실종된 것으로 파악했다. 사인은 과다출혈과 머리에 가해진 충격이었다. 범죄 전문가들은 네크로필리아(시체에 애착을 느끼는 이상 성욕) 등 성도착증 환자에 의한 범행일 거라 추정했다. 사망 직전 쇼트가 성폭행당했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제기됐으나, 검사 결과 아니었다고 한다. 사건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쇼트의 ‘사라진 일주일’ 동안 그가 어디에, 누구와 있었는지에 대한 정보가 수집되지 않으면서 수사는 미궁에 빠졌다.

사건이 수렁에 빠져 있는 동안 쇼트의 살해범을 자칭하는 수많은 ‘관심종자’들이 경찰을 찾았다. 초동수사 때에만 허위 자백한 사람이 60여 명이었다. 자신이 몇날 몇시 특정 장소에 나타나겠다며 ‘잡을 테면 잡아봐라’는 식의 조롱 편지가 경찰서에 날아오기도 했다. 자신이 쇼트를 죽였다면서도 정작 사건이 있었던 1947년엔 태어나지도 않았던 허무맹랑한 신고자도 있었다. 500명 이상의 허위 신고자들은 대부분 공무집행방해죄로 기소됐다. 그렇게 사건은 77년이 지난 지금까지 해결되지 못하고 장기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미 범죄 소설 작가 제임스 엘로이의 1987년 작품 '블랙 달리아' 표지.

쇼트 살해 사건에 투입된 수사관은 750명에 육박했다. 이중 한 명인 랠프 애스델은 2003년 타임스 인터뷰에서 쇼트가 죽은 채 발견된 당일 새벽 공원 인근에 세단 한 대가 주차돼 있었던 점을 언급했다. 조사 결과 차주는 지역 식당에서 일하는 남성 직원이었다.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애스델은 그가 목격자와 마주쳤을 때 놀라는 기색을 보이곤 이내 도주했던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실제 범인일 확률이 높다고 밝혔다.

타임스 편집자였던 래리 하니슈는 지역 외과의사 월터 베일리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베일리 외에도 쇼트의 시신이 전문 기술이 없다면 어려울 정도로 깔끔히 절단돼 있다는 점에서 해부학을 공부한 의사 혹은 의과대학생들이 경찰 수사망에 포함됐다. 이 밖에도 살해범을 자칭한 수많은 편지들 중 쇼트의 출생증명서와 명함, 사진 등을 담고 있었던 소포에 포함된 주소록의 주인으로 추정됐던 마크 한센 등이 용의자 후보에 들었다. 지역 유지이자 나이트클럽 소유주였던 한센은 역시 경찰 조사에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1987년 미국 범죄 소설 작가 제임스 엘로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 '블랙 달리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2006년 개봉했다./imdb

미 작가 제임스 엘로이는 1987년 쇼트 살해 사건을 주제로 ‘블랙 달리아’란 범죄소설을 썼다. 사건 이듬해인 1948년 태어난 엘로이는 10살 때 자신의 어머니가 성폭행 당해 살해를 당했으나 범인이 잡히지 못한 것을 계기로 쇼트 사건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블랙 달리아’처럼 큰 관심을 끌지 못했을 뿐, 세상엔 알려지지 않은 미제 사건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소설은 2006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조쉬 하트넷과 스칼렛 요한슨 등 할리우드 스타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지만 흥행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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