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버네이 퍼트리샤 램지양 살해 사건을 다룬 미국 주간지 피플의 1997년 1월호 표지/피플
잔혹하고 끔찍한 살해를 저지른 후 감쪽같이 사라진 범인들. 수십 년 전 일어났지만 아직까지도 진범을 잡지 못한 장기 미제사건들이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사건 발생 당시보다 수사력이 발전한 오늘날에도 범인의 생존여부조차 알 수 없는 오리무중 상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 사건들의 면면을 재조명해본다. /편집자주

※ 이 기사에는 잔혹한 범죄 상황 묘사가 포함돼 있습니다.

각종 ‘예쁜 어린이 선발대회’를 휩쓸던 ‘뷰티 퀸’ 6세 소녀의 피살. 범인으로 의심받는 가족들과 이웃들. 자극적인 살인 사건에 쏟아지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관심. 망상 속에 이어지는 허위 자백들. 28년 전 일어나 아직까지도 미국을 대표하는 아동 살인 사건으로 손꼽히는 ‘존버네이 램지 살인 사건’을 설명하는 키워드들이다. 허술한 경찰 수사와 자극적인 언론 보도로 인해 부모와 친오빠가 ‘유력 용의자’로 지목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운명에 처할 수 밖에 없었던 비극. 사람들이 책임 없이 쏟아낸 근거 없는 ‘뇌피셜’로 얼룩져, 진실은 저 너머로 사라져 버린 사건.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은 미국 콜로라도주(州) 볼더 카운티에 살던 존 버네이 램지 가족. 존 버네이 램지(당시 53세)와 퍼트리샤 램지(당시 40세)의 둘째 딸 존버네이 퍼트리샤 램지(당시 6세)가 의문의 범인에게 살해당한 사건이다. ‘존버네이’라는 특이한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 ‘존’과 중간 이름 ‘버네이’를 한 단어로 붙인 것이다. 딸의 중간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 퍼트리샤를 따왔다. 때문에 이 사건은 통칭 중간 이름을 생략한 딸의 이름 ‘존버네이 램지’ 사건이라고 불린다. 아래부터는 이해하기 쉽게 아버지를 ‘존’, 어머니를 ‘퍼트리샤’, 피해자인 딸을 ‘존버네이’로 칭한다.

존버네이 퍼트리샤 램지가 생전에 어린이 미인대회에 참가했을 당시의 사진. /위키피디아

◇크리스마스 이튿날 잔인하게 살해된 ‘리틀 미스 콜로라도’

1996년 크리스마스 이튿날. 전날 가족들과 함께 이웃집을 방문해 즐거운 크리스마스 파티를 보낸 퍼트리샤는 오전 5시30분쯤 일찍 일어나 커피를 마시러 부엌으로 향했다. 2층 침실에서 내려오던 그는 계단 바닥에 놓여 있던 협박장을 발견했다. 집에 있던 메모지를 이용한 세 장 분량의 협박장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당신의 딸을 데리고 있다. 그녀를 무사히 돌려받고 싶으면, 11만8000달러의 돈을 준비하라. 오전 8시~10시 사이 연락하겠다. 경찰에 신고하면 딸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당시 환율로 치면 1억이 넘는 거액이었다. 부부는 일단 황급히 딸을 찾았지만 딸은 보이지 않았다.

경찰에 전화하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오전 6시 ‘911′에 전화했다. 즉시 도착한 경찰은 현장을 둘러보았고, 별다른 침입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예고된 시간이 지나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집을 구석구석 뒤져보는 일밖에 없었다. 오후 1시쯤 존은 지하 창고에서 싸늘히 주검으로 변한 딸을 발견했다. 그는 직접 딸의 시신을 1층으로 옮겼다.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흰색 담요에 싸인 존버네이는 머리 위로 손목이 묶이고 입에는 테이프가 붙여진 상태였다. 질식사한 것으로 판명됐지만, 전기 충격기 쇼크 등의 흔적도 있었다. 위에는 소화되지 않은 파인애플이 있었다. 성폭행 정황도 발견됐다.

‘예쁜 어린이’로 이미 유명했던 초등학교 1학년생 존버네이의 미스터리한 죽음은 바로 큰 뉴스가 됐다. 딸을 ‘미스 아메리카’로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던 퍼트리샤는 딸이 세 살이 되던 해부터 미소녀 선발 대회에 참가시켰다. 그 결과 존버네이는 리틀 미스 캘리포니아, 리틀 미스 콜로라도, 리틀 미스 선샤인, 리틀 미스 크리스마스 등 수많은 타이틀을 보유하게 됐다. 과거 어린이 미인 대회에 참가했던 존버네이의 귀여운 사진이 잇따라 공개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폭발하기 시작했다.

존버네이 램지 사건이 발생한 당일, 램지 가족의 집에서 발견된 노트. 딸을 유괴했고, 11만8000달러를 요구한다는 내용의 협박문이 세 페이지에 걸쳐 적혀 있다./인터넷 커뮤니티

◇범인으로 의심받는 가족들

경찰은 곧바로 피해자의 가족을 범인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납치범으로부터 전화가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부모가 태연했다는 게 그들과 함께 연락을 기다린 형사의 증언이다. 오전에 경찰과 함께 집을 수색했을 당시 지나쳤던 지하실의 방을, 존이 오후에 본격 수색이 시작되자마자 곧장 찾아갔고 바로 시신을 발견한 일도 의심스러웠다. 심지어 존은 모든 걸 제자리에 두라는 경찰의 말을 무시하고 멋대로 시신을 위층으로 옮겨 시신과 현장을 크게 훼손했다.

협박 편지도 이상했다. 집에 있던 메모지에 쓰인 데다 세 쪽이나 되는 장문(長文)이었다. 외부인이 사람을 죽이거나 납치하려 집에 침입한 이후에 즉석에서 그렇게 긴 글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들 얘기다. 범행 도구 중 하나가 존버네이가 평소에 쓰던 그림 붓이라는 점도 수상했다.

11만8000달러라는 몸값 금액도 이상했다. 존이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받은 보너스 액수와 완전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사고 때문에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경찰의 심문을 받지 못하겠다고 버티던 램지 부부는 갑자기 TV 인터뷰에 불쑥 출연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을 보였다. 여러가지 정황상 부모가 용의선상에 오르는 게 자연스러웠다.

1997년 5월 존버네이 퍼트리샤 램지의 아버지 존 버네이 램지(왼쪽)과 어머니 팻시 램지가 지역 매체와 인터뷰를 하는 모습. /유튜브

수사 당국에도 문제는 있었다. 사건 당시 현장에 가족의 지인 및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존버네이의 침실을 제외한 집안 구석구석을 여러 사람들이 드나들며 흔적을 남기는 등 현장 훼손이 심했다. 혼란 가운데 경찰의 심증에 따른 표적 수사는 가족들에게 집중되고, 이에 호응하는 보도가 이어지며 부모가 진범이라는 의심이 정설처럼 퍼졌다. ‘아버지가 딸을 성폭행한 사실을 숨기려고 그랬다’, ‘난소암 치료 이후 우울증을 앓던 어머니가 우발적으로 딸을 죽였다’는 등 다양한 설이 난무했다. 존버네이의 세 살 터울 오빠 버크 램지 또한 용의선상에 올랐는데,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한 여동생을 시기해 이 같은 범죄를 저질렀고 부모가 이를 덮기 위해 자작극을 펼쳤다는 추측이다.

그러나 수 년간의 면밀한 수사에도 가족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1999년 10월 주 검사는 부부를 기소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으로서는 수사 당국의 미진한 현장 보존과 오판이 이 사건이 미궁 속으로 빠진 가장 큰 원인으로 여겨진다. 외부의 침입이 없었다는 처음 발표와 달리, 당시 깨져있던 지하실의 창문과 외부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츠 자국까지 남아 있었는데 경찰은 이를 제대로 포착하지 않았다. 초동 수사 부실 탓에 현장이 오염됐고, 외부 침입에 의한 살인 가능성을 초기에 배제하는 바람에 그나마 남아 있던 작은 증거들조차도 놓쳐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2008년, 존버네이가 살해 당시 입고 있던 옷과 속옷에서 검출된 DNA에 대한 검사가 이루어지면서 범인은 가족이 아닌 제 3자로 판명됐다. 다만 DNA가 누구의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10년 넘게 언론에서는 마치 가족이 진범인 것처럼 다루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가족범인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과거 수사 팀에 있던 형사들도 단순히 DNA 결과만으로 유력 용의자인 가족들을 용의선상에서 제외할 수 없다고 아직까지 주장하는 중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여전히 가족들이 범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

2016년 CBS가 방영한 프로그램 ‘존버네이 램지 사건’/CBS

심지어 미국의 지상파 방송사 CBS는 2016년 ‘존베네이 램지 사건’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범죄전문가들을 인용, 당시 9세였던 친오빠인 버크 램지가 사건의 진범이라는 분석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이에 생존한 램지 가족들이 CBS를 상대로 약 7억5000만 달러, 당시 기준으로 약 9000억원 규모의 피해보상금 소송을 냈다. 프로그램이 방영된 지 8년 후인 지난 1월, 당사자들이 합의를 봐 소송이 취하됐다. 합의금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수상한 이웃들과 이어지는 허위 자백

2019년 1월, 이웃의 갑작스런 실토가 나왔다. 당시 램지 가족과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살던 이웃 주민 게리 올리바(당시 32세)가 본인이 존버네이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2016년 아동 성착취 혐의가 인정돼 수감 중이던 그 무렵 고교 동창생에게 보낸 편지에 “사고로 존버네이가 죽었는데, 내 실수였다”고 적었다고 한다. 그러나 올리바의 고백은 사실이 아니었다. 이미 수사 초기, 유력 용의자로 지목돼 연행됐지만 DNA 불일치로 풀려난 인물이기 때문이다.

관심을 끌고 싶어서일까. 워낙 유명한 사건이다보니, 올리바처럼 본인이 사건의 진범이라고 거짓 주장하는 사람은 여럿 있었다. 사건 발생 이후 10년이 지난 2006년 8월, 태국 방콕에서 진범으로 의심되는 교사 출신 41세 미국인 존 마크 카가 붙잡혔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존버네이를 사랑했고, 그가 숨진 건 사고였다. 마약을 한 뒤 성관계를 가졌다. 그에게 미안하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DNA가 같지 않았고, 그의 진술이 범죄 상황과 일치하지 않아 검거 열흘 만에 허위 자백임이 밝혀졌다. 사고가 알려진 이후에야 존버네이의 흔적을 찾아 주위를 맴돌며 수사 기관에 가짜 단서를 흘린 과대망상증 환자였다.

이외에도 용의선상에 올랐던 이웃들이 더러 있었다. 사건 이틀 전 램지 저택 성탄 파티에서 산타클로스로 분장했던 이웃 주민 빌 맥레이놀즈가 대표적인 사례다. 사건일의 딱 22년 전인 1974년 12월 26일 아홉 살이던 딸이 성범죄자에 의해 납치된 적이 있었고, 그의 아내는 1976년 여아가 성폭행·고문을 당한 뒤 살해돼 지하실에서 발견된다는 이야기의 연극 극본을 썼었다. 존버네이와 친분이 깊었고,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DNA 조사 덕에 혐의가 풀렸다.

2016년 미 방송사 ABC의 프로그램 '닥터 필 쇼'에 나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존버네이 퍼트리샤 램지의 오빠 버크 램지. /'닥터 필 쇼' 유튜브

이처럼 여섯 살 소녀가 잔인하게 당한 끔찍한 살인 사건의 진실은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사람들의 추측의 영역에서만 머무르고 있다. 무고한 용의자들이 끝날 기약 없는 손가락질을 인내하는 동안, 진범은 안전히 정체를 숨기고 있다. 무고함을 주장해도 수십년째 범인이라는 의심을 벗어던지지 못한 램지 가족은 그동안 어떻게 됐을까.

엄마 퍼트리샤는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 뒤인 2006년 난소암이 악화돼 사망했다. 사건 당시 IT 회사를 운영 중이던 아빠 존은 이후 회사를 매각했고, 딸의 사고로 인한 누명 때문에 사업과 구직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한 적이 있다. 퍼트리샤와의 결혼이 두 번째였던 존은 2011년 세 번째 아내인 디자이너 얀 루소와 결혼했다.

현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오빠 버크 램지는 2016년 오랜 침묵을 깨고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가지기도 했다. “오랫동안 미디어의 광적인 관심은 기본적으로 우리 삶을 미치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은 정말 혼란스러운 악몽이었고, 그 때문에 더욱 낯을 가리는 성격이 됐다”라는 심경을 고백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웃으며 덤덤히 인터뷰를 하는 버크의 모습을 보고서, 혹시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니냐며 여전히 의심을 지우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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