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하지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교 성지 메카로 향하는 한 도로를 걷고 있는 수많은 하지 순례객들의 머리 위로 더위를 식히기 위한 물 분사기가 가동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최고기온 51도의 살인적 더위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덮치면서 정기 성지순례(하지)에 나선 무슬림 순례객 1300여 명이 온열 질환으로 사망했다. 하지 기간에는 대규모 압사 사고가 종종 일어나지만 날씨 때문에 이 같은 규모의 참사가 발생한 것은 이례적이다. 사우디의 이슬람 성지 메카의 최고기온이 48도를 기록한 작년에도 순례객 230여 명이 사망했지만 올해는 그 5배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대부분은 이집트 등 외국에서 온 저소득층으로, 변변한 교통수단이나 숙박 시설을 구하지 못하고 폭염 속에 걸어서 성지로 향하다 변을 당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기후변화의 여파가 가장 먼저 취약 계층을 덮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14~19일 엿새에 걸친 하지 기간 동안 메카 일대 일평균 최고기온은 46~49도 사이였다. 관측된 최고기온은 51.7도까지 치솟았다. 이 기간 하지에 참여한 인파는 사우디 국민 22만명을 포함한 총 183만여 명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날씨에도 이들이 사우디를 찾는 이유는 이슬람 교리상 모든 무슬림은 일생에 한 번 이상 의무적으로 메카를 방문해 성지순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기 순례 날짜는 음력인 이슬람력으로 정하기 때문에 매년 달라지지만, 보통 5~6일 동안 전 세계에서 최대 200만명의 무슬림이 한꺼번에 메카로 모여든다.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카바 신전에 지난 17일 새까맣게 몰린 순례객들. 성지순례 기간인 14~19일 한낮 최고기온은 51도까지 치솟았다. 숨 막힐 듯 인파가 몰리는 상황에서 살인적인 더위까지 겹쳐 순례객 1300명이 숨졌다. /AP 연합뉴스

길거리에 사망자의 시신이 무단으로 방치되는 등 현지에선 아수라장이 벌어졌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일간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메카 외곽 도로변에서 흰 천에 덮인 시신들이 목격됐다고 보도했다. 시신 수십여 구가 이집트 의료 당국의 트럭에 실려가는 영상이 온라인에 퍼지기도 했다.

사망자 대부분은 저소득층으로 추정된다. 사우디 당국은 엄격한 허가제를 통해 해외 순례객을 가려 받는데, 여행비를 충당할 수 없는 이들이 노숙을 감행하며 봇짐을 들고 맨몸으로 순례길에 나섰다가 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이집트인의 경우 1인당 6000달러(약 833만원)를 지불해야 사우디 정부의 성지순례 전용 비자가 발급되는 순례단에 참가할 수 있다.

파하드 알잘라젤 사우디 보건장관은 국영 방송에서 “하지 기간 온열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가 1301명으로 집계됐으며, 이 중 83%는 사우디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무단으로 성지순례를 온 경우”라고 밝혔다. 사망자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온열 질환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부상자만 2764명에 이르고, 신분증을 소지하지 않은 채 길바닥에 쓰러져 숨진 경우도 많아 국적과 신원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를 찾은 한 순례객이 지난 16일 폭염에 쓰러진 모습. 사우디 측은 메카 순례 중 숨진 1300여 명 중 80%는 당국의 허가 없이 무단으로 온 저소득층이라고 했다. /AFP 연합뉴스

순례객들을 대상으로 한 사기도 성행해 피해를 키웠다. 무허가 여행사들이 전용 비자가 아닌 일반 관광 비자로 순례객을 모집한 뒤, 메카에 진입할 수 있는 차량을 보내주겠다며 길에 남겨두고 떠나는 등의 수법이다. CNN은 미국 국적의 무슬림 부부가 여행사에 2만3000달러(약 3194만원)를 지불했지만 지난 15일 현지에서 약속한 교통편이 오지 않아 걸어서 길을 나섰다가 사망한 사연을 소개했다. 부부의 딸은 CNN에 “사우디 정부가 부모님 시신을 연락도 없이 매장했는데 정확한 장소조차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요르단, 이집트, 튀니지 등에서는 정부가 가짜 관광 상품을 판매한 여행사 처벌에 나섰다.

이번 참사는 천재지변이 아닌 인재(人災)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예년보다 심각한 폭염을 경고한 예보가 있었는데도 사우디 당국이 식수나 에어컨이 있는 차량 등을 충분히 지원하지 못했고, 무허가 순례객들에 대한 안전 조치에 사실상 손을 놓았다는 것이다. 작년부터 순례객의 나이 제한을 없앤 것도 피해가 커진 요인이 됐다는 분석이다. 원래 사우디 당국은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고령자의 순례를 제한해 왔는데, 2020년부터 2년간 코로나로 순례를 하지 못한 교인이 적체되자 작년부터 나이 제한을 없앴다. 이에 따라 폭염에 취약한 고령 순례자가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기후변화로 인해 하지 순례의 위험성이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독일 베를린 소재 국제 기후 연구기관인 클라이밋 애널리틱스는 로이터에 지구 평균 기온이 1.5도 상승할 때마다 하지 순례객의 열사병 사망 위험이 최대 5배까지 증가할 수 있다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도 2050년이면 사우디 메카는 연중 182일에 걸쳐 ‘목숨을 위협하는’ 수준의 더위를 겪게 될 것으로 분석했다.

☞이슬람 성지순례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가 태어나서 알라의 계시로 이슬람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한 최고 성지 메카를 순례하는 것을 말한다. 이슬람력 12월에 맞춰 정해진 기간에 하는 대순례(하지·Hajj)와 특정 기간 외에 하는 소순례(움라·Umrah)로 구분된다. 신체 건강하고 경제적 여건이 되는 무슬림은 반드시 평생에 한 번 ‘하지’를 해야 한다. 이슬람력을 기준으로 하다 보니 라마단(금식월)과 마찬가지로 해마다 날짜가 바뀐다. 순례객들이 똑같이 흰 옷을 입은 것은 신 앞에서 신분의 귀천 없이 평등하게 행렬에 동참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는 의미가 깃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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