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제프 랜드리(공화당) 루이지애나 주지사가 모든 공립학교 교실에 기독교 십계명을 포스터로 만들어 게시해야 한다는 법안에 서명했다. /AP 연합뉴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가르치는 열 가지 근본 계율인 십계명의 조항들이다. 앞으로 십계명이 적힌 포스터를 루이지애나주(州) 공립 유치원과 초·중·고교 교실, 대학 강의실에서 보아야 할 전망이다. 주 정부가 미국 50주 중 처음으로 관내 공립학교 교실에 십계명을 의무적으로 게시토록 법제화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소속 제프 랜드리 루이지애나 주지사는 19일 이 같은 내용을 포함해 18개 교육 관련 법안에 일괄 서명하며 ‘십계명 게시’를 의무화했는데, 후폭풍이 거세다. 정치와 교회(종교)를 분리하는 미국의 국가 원칙에 맞지 않고 언론·출판·종교의 자유를 적시한 수정헌법 1조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반발이 커지고 있다. 넉 달여 앞으로 다가온 대선의 쟁점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된다.

루이지애나 시민 자유 연합, 정교 분리를 위한 미국인 연합, 종교로부터의 자유 재단 등 시민단체는 24일 공동성명을 내고 “우리 공립학교는 주일학교가 아니다. 이 법은 종교의 자유에 대한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했다. 이들은 이날 “‘십계명 게시법’이 학생들에게 종교적 믿음을 강요해 기독교인이 아닌 학생들을 소외시킬 것”이라고 지적하며 이날 법원에 소송을 냈다.

이번에 공포된 법안은 십계명 게시에 대한 세세한 규정을 포함했다. 예를 들어 열 가지 계율을 담을 포스터 크기는 가로 28㎝·세로 35㎝보다 작으면 안 된다. 십계명은 포스터 한가운데 적고, 십계명을 적은 글꼴은 큼지막하고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부연 설명을 담은, 네 단락으로 된 성명서도 필요하다. ‘십계명은 약 3세기 동안 미국 공교육의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등의 내용이다. 단 포스터의 제작 비용은 기존 학교 예산이 아닌 외부 기부금으로 충당하도록 규정했다.

공화당이 주도하는 주정부와 주의회는 시민단체 등의 비난을 일축하고 있다. 랜드리 주지사는 법안 서명식에서 “(미국이) 법치를 존중하기 원한다면, 모세(십계명을 하나님에게 받은 성경 속 인물)라는 최초의 율법 제정자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독교와 유대교가 추앙하는 예언자를 보편적 가치를 지닌 인물로 규정하는 발언이다. 법안을 발의한 공화당 도디 호턴 주 하원 의원은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이 옳다 혹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될 전망”이라고 했다. 미 언론인 ‘미국의 소리’는 “새 법을 지지하는 쪽에선 기독교적인 보수 가치를 확산시킨다며 환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은 대통령과 대법원장 등이 취임 선서를 할 때 성경에 손을 얹을 정도로 기독교 전통이 강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다종교·다문화 사회를 표방한다. 미군 군종병과에는 목사·신부뿐 아니라 이슬람교·불교·힌두교 장교도 복무한다. 이 때문에 특정 종교의 가르침을 공립학교에 의무적으로 게시하는 것은 미국 사회의 가치에 역행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래픽=양진경

많은 논란 속에 이 같은 법안이 공포된 과정엔 미 남부 지역인 루이지애나의 정치적 특성도 작용했다는 평가가 많다. 루이지애나는 흑인 인구 비율이 33%로 미시시피에 이어서 미국에서 둘째로 높다. 기독교 복음주의의 영향력이 강한 남부 ‘바이블 벨트’에 속한 지역이기도 하다. 재즈의 발상지로 연중 관광객이 몰려드는 최대 도시 뉴올리언스의 자유롭고 이국적인 분위기 때문에 정치 지형도 진보 성향이라고 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이곳은 과거부터 공화당이 강세를 보여온 ‘레드 스테이트’로 분류돼왔다. 흑인 노예제 존치를 주장한 남부연합군의 주된 기반이었던 지역으로 전통적으로 보수 색채가 강하다. 연방 의회와 주 의회에서도 공화당이 다수를 이룬다. 연방 하원의원과 연방 검사장을 지낸 랜드리 주지사는 이달 초에 역시 미 50주 중 최초로 성범죄자에 대한 물리적 거세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보수 색채가 짙은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왔다.

루이지애나에서 불거진 ‘십계명 논란’은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보수·진보의 정치 이슈로 불거질 조짐도 보이고 있다.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22일 워싱턴 DC 행사에서 “(교실에) 십계명을 걸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친 세상”이라며 루이지애나의 조치에 반발하는 이들을 비난했다. 이 문제가 결국 연방 대법원까지 갈 가능성도 제기된다. 연방대법원은 1980년 공립학교에 십계명을 설치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고, 1992년엔 공립학교 내 기도가 학생들에 대한 압력이 될 수 있으니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바이블 벨트

성경(바이블)에 빗대 기독교 복음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 동남부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루이지애나·미시시피·아칸소·앨라배마·오클라호마·조지아·테네시 등이 속한다. 동성애와 낙태·마약 등에 대한 반대·혐오 정서도 미국 내 다른 지역보다 두드러진다. 이런 특성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공화당의 표밭으로 인식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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