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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이분법적 정치 행태에 대한 풍자.

지난 13일 미 대선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저격한 암살 미수범은 공화당 당원이면서 민주당 지지단체 기부자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름은 토머스 매튜 크룩스. 나이 20세의 백인 남성.

사건이 벌어진 펜실베이니아에 부모님과 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펜실베이니아는 ‘스윙스테이트(경합주)’입니다.

그는 이번 대선에서 처음으로 얻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투표 대신 총을 택했고, 범행 직후 비밀경호국 요원의 총에 사살돼 다시는 투표를 할 수 없게 됐습니다.

크룩스는 좌파일까요? 우파일까요? 그는 왜 극단적 방법으로 유력 공화당 후보를 선거 100여일을 앞둔 상황에서 제거하려 했을까요?

범행 동기 등은 현재 수사 중입니다. 공개된 그의 이력만을 봤을 때는 크룩스의 정치적 성향이 어떤지 가닥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지난 2월 워싱턴 D.C. 정치 연구소가 모인 듀퐁 서클 인근 서점을 찾았을 때 만난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정치적 뜻을 관철하기 위해 폭력을 택하는 일이 왜 벌어지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저자는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책 제목은 ‘좌파와 우파라는 미신 : 정치적 스펙트럼은 어떻게 미국을 해(害)하고 오도(誤導)하는가(The Myth of Left and Right: How the Political Spectrum Misleads and Harms America).

형제인 히럼 루이스(Hyrum Lewis) 브리검 영 아이다호 대학 교수와 벌란 루이스(Verlan Lewis) 하버드대학 교수의 공동 저서입니다.

2022년 글로벌 자산운용사 블랙록 광고에 출연한 트럼프 총격 용의자 크룩스. /엑스

◆ “프리드먼과 히틀러는 같은 우파?”

책은 우리가 아는 ‘좌파’나 ‘우파’라는 개념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고 지적합니다. 좌파, 우파, 진보, 보수, 중도, 중도보수 같이 정치적 스펙트럼을 나누고 분류하는 것은 잘못됐으며, 이로 인해 정치적 갈등과 증오심이 심해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에서 흔히 낙태 반대, 낮은 세금(작은 정부), 이라크 전쟁 등에 찬성하면 ‘보수적’이라거나 ‘우파’라고 분류합니다. 하지만 책은 이런 정책들을 관통하는 본질적인 가치와 이데올로기는 없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이른바 ‘좌파’ 또는 ‘진보’ 세력은 자유주의 시장경제 학자인 밀턴 프리드먼을 ‘우파’라고 규정짓습니다. 그런데 좌파는 동시에 반자본주의자이자 군국주의자인 아돌프 히틀러도 ‘우파’라며 비난합니다. 유대인인 프리드먼이 반유대주의자인 히틀러와 도매금(都賣金)으로 ‘우파’로 분류돼 비난을 받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정치적 스펙트럼을 분류하는 데는 다차원적인 접근이 필요한데, 일차원적 결과만을 내놓으려 하고, 그렇게 억지로 얻은 결과로 상대방을 낙인 찍다 보니 서로에 대한 오해가 생기고 갈등이 깊어져만 간다는 것입니다.

책은 오늘날 정치는 이념이나 가치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야구팀을 응원하고 그 야구팀의 선택이면 동조하는 일종의 정치 부족화, 종족화 상태에 있다고 진단합니다.

나는 ‘인권’을 중시해, 그러니까 나는 A당을 지지하고, 나는 ‘진보’야, 라고 스스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실상은 자기가 속한 환경과 집단, 고향, 주변 사람 등에 의해 A당을 어떤 계기로 지지하게 되고, 그 후로 그 정당의 각종 정책에 쉽게 동조한다는 것입니다.

‘인권’을 우선시하는 사람이 A당의 반인권적 정책에 대해서는 분개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런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논리에 순응합니다. A당이 ‘인권’을 내세우는 정당인데도 그것과 배치되는 선택을 하는 것도 언제든 상황에 따라 원칙과 철학을 뺐다 끼울 수 있을 만큼 원칙이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입니다. ‘인권’이라는 원칙은 A당이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일뿐 ‘본질’이 아닌 셈입니다.

‘좌파와 우파라는 미신 : 정치적 스펙트럼은 어떻게 미국을 해(害)하고 오도(誤導)하는가(The Myth of Left and Right: How the Political Spectrum Misleads and Harms America).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희생해야 한다는 모순”

미국은 1920년대 전만 해도 좌파와 우파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용어는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때 생겼습니다. 당시 의회에서 의장석 중심으로 왼쪽에는 혁명 지지자, 오른쪽에는 반대파(왕당파)가 앉아서 이들을 좌파, 우파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입니다.

19세기 동안 이 용어는 유럽 대륙 전체로 퍼졌고, 20세기 초 러시아 볼셰비키가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러시아 혁명가들은 자신들을 프랑스 혁명가들과 동일시하며, 자신들의 목표를 평등주의 혁명으로 간주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1920년대 러시아 혁명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좌파 우파란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책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이른바 좌우 스펙트럼이 복잡해지고 단일 차원의 정치 모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고 지적합니다.

‘보수’는 경제적 자유를 강조하며 ‘작은 정부’를 외쳤지만, 동시에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개인의 일상에 공권력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며 ‘큰 정부’를 요구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희생해야 한다는 모순적인 태도가 나타났다고 책은 지적합니다.

◆적대감 키우고 절차 무시하며 폭력도 정당화하는 부족주의

트럼프와 바이든. /연합뉴스

저자는 정치 부족주의(Political Tribalism)를 경계합니다. 정치 부족주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그룹이나 진영에 깊이 몰입하여 다른 진영의 사람들과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 현상은 정치적 대화에서 균형과 이해의 부족을 초래할 수 있으며, 정치적 결정 과정에서 협력보다는 대립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부족주의는 종종 개인이나 그룹이 논리적인 논증보다는 감정적인 반응에 더 많이 의존하게 만들며, 이는 궁극적으로 사회적 통합을 저해하고 정치적 극단주의를 조장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일원으로서, 그 집단이 추구하는 바를 무비판적으로 따라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줍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이념이나 가치, 원칙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그것에 따라 의사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나의 고향 사람들이 주로 뭘 말하는지, 누굴 싫어하는지, 나의 동년배 친구들의 문화가 뭔지에 따라 쉽사리 정치적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트럼프 저격범 크룩스는 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택했을까요? 이 책은 이번 사건이 일어나기 수개월 전에 출간된 것이지만, 책 내용대로라면, 이러한 정치적 폭력은 복잡다단한 정치적 지형을 빨간색 아니면 파란색으로 분류하는 극단적 이분법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요즘 한국에서도 저 정치인이 우파가 맞느냐, 저 정치인을 진보라 할 수 있느냐 같은 말을 자주 합니다. 어느 잣대로는 보수적 가치가 걸맞은 정치인이지만, 다른 잣대로는 보수라고 말할 수 없는 정치인도 있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도 이 책의 저자 주장대로라면 우파, 좌파, 보수 진보라는 표현으로 한 사람의 정치적 스펙트럼을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촌극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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