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를 상대로 관세 전쟁을 벌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7일 기준 금리 인하를 압박하며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 해임을 시사했다. 파월이 자신의 요구대로 기준 금리를 인하하기는커녕 관세 정책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우려를 경고하자 112년 연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중도 해임’ 카드를 꺼내 보인 것이다. 트럼프가 대통령 1기(2017~2021년) 때 재닛 옐런의 후임으로 임명해 2018년 연준 의장에 취임한 파월의 임기(연임 가능)는 내년 5월까지다.
1기 때도 파월에게 증시 부양 등을 위해 기준 금리를 내리라고 노골적으로 압박했던 트럼프는 파월과 다시 충돌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월가(街)와 워싱턴 DC에선 트럼프가 연준 독립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려 한다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는 이날 오전 소셜미디어에서 “유럽중앙은행(ECB)이 일곱 번째로 금리 인하를 단행하려 하는데도 항상 너무 늦고 틀린 ‘느림보(Too Late)’ 파월은 어제 또 완전히 엉망진창인 보고만 했다”며 “(파월은) 이미 오래전에 금리를 내려야 했다. 그의 해임은 빠를수록 좋다”고 했다. 그가 언급한 파월의 ‘보고’는 전날 시카고 이코노믹 클럽 연설에서 파월이 “(트럼프의) 관세 인상이 최소한 일시적으로 인플레이션 상승을 유발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발언한 것을 가리킨다. 파월은 이 자리에서 연준이 최근 하락 중인 미국 주식 시장을 기준 금리 인하 등으로 부양할 의도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없다”고 못 박았다.

지난 1월 대통령 2기를 시작한 직후부터 트럼프는 연준이 기준 금리 인하를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관세 인상 공포로 주식 시장이 폭락한 이달 초엔 “지금이 금리를 인하할 완벽한 시기”라며 파월을 압박했다. 반면 코로나 팬데믹 당시 정부의 막대한 돈 풀기가 초래한 인플레이션에 제때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던 파월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트럼프가 관세를 인상해 상품 가격이 올라갈 경우 간신히 잡힌 물가가 다시 상승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고 본다. 파월은 “사람들이 뭐라든 우리는 정치 같은 외부 요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일을 하겠다”고 했다.
파월의 해임을 시사한 트럼프의 발언에 대해선 연준의 독립성을 무시했다는 평가가 많다. 블룸버그는 “정치인들이 (주가 부양 같은) 단기적 이익을 우선해 연준에 잘못된 통화 정책을 강요하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표 관세 전쟁의 실무자 격인 스콧 베선트 재무 장관조차도 지난 14일 연준의 독립성에 대해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되는 보석 상자”라고 했다. 백악관 관계자들에 따르면, 베선트는 “파월을 교체해도 얻을 이익이 크지 않다”며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1913년 설립된 연준의 의장이 대통령 눈 밖에 나 임기 중에 해임된 사례는 아직 없다. 연방준비제도법은 연준 의장의 임기를 4년(연임 가능)으로 못 박고 있고, 대통령 명령으로 의장을 해임할 수 있는지는 법원에서 검토된 적이 없다.
트럼프 1기 때 파월은 인플레이션에 선제적으로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2018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기준 금리를 총 1%포인트 올렸다. 당시에도 트럼프는 ‘파월은 멍청하다’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트럼프는 그때도 파월을 해임하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2020년 초부터 코로나가 확산하자 연준이 경제 충격 방어를 위해 기준 금리를 ‘제로(0%)’로 내릴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파월은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를 이기고 2021년 취임한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의 승인으로 연임돼, 2022년 5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파월은 지난해 11월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 기자회견에서 “트럼프가 요구하면 그만둘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니요”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