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오는 29일로 예정된 자민당 총재 선거 불출마를 결정하며 사임 의사를 밝힌 뒤 일본 정계가 요동치고 있다. 일본의 차기 총리를 결정하는 이 선거에서 기시다 후미오 전 외무상, 고노 다로 행정규제개혁상(백신담당상),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의 3파전이 예상됐는데, 여성 후보 다카이치 사나에(60) 전 총무상이 4일 다크호스로 급부상했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다카이치에 대한 지지 의사를 내비쳐 일각에서는 ‘일본 첫 여성 총리 탄생’ 가능성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지난 2014년 9월 아베 신조(앞줄 왼쪽) 당시 일본 총리가 개각 후 신임 각료들과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다카이치 사나에 당시 총무상(앞줄 오른쪽) 등과 나란히 걷고 있다. 아베 전 총리가 최근 다카이치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3파전이던 차기 총리 구도는 4파전으로 재편됐다고 일본 언론매체들이 전했다. /AP 연합뉴스

다카이치는 지난 8월 돌연 총재 선거 입후보를 발표했을 때만 해도 큰 주목을 끌지 못했다. 자민당 내 소속 파벌이 없어 선거 출마에 필요한 추천 의원 20명을 모으기도 빠듯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지난해 총리 퇴임 후에도 여전히 자민당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아베 전 총리 한마디에 판세가 변했다. 아베 전 총리는 자신이 속한 최대 파벌 호소다파(총 97명) 의원들에게 다카이치 지지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카이치의 정치 신조와 여성이라는 점이 호소력이 있다”는 이유다.

1993년 나란히 중의원에 당선된 아베 전 총리와 다카이치는 우파 정치 노선을 공유해온 정치적 동지다. 5일 아사히신문은 다카이치를 총재 선거에 뛰어든 차기 후보자 중 아베의 노선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실제 다카이치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사죄한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비판하며 수정을 요구했다. 당시 외무위원회에서 “적어도 나 자신은 (전쟁) 당사자라고 할 수 없는 세대”라며 “반성 같은 것은 하고 있지 않다”고 발언했다. 헌법 개정을 주장하고, A급 전범을 합사(合祀·합동 제사) 중인 야스쿠니 신사를 단골 참배하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는 최근에도 “총리가 돼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다카이치는 분명한 우파 성향 탓에 중도파로부터 지지받을 가능성이 크지 않다. 대중 인지도도 낮아 아베 혼자만의 지지로 대세가 되기엔 역부족이란 지적이 많다. 여성의 지지를 얼마나 끌어모을 수 있는지에도 의문 부호가 찍힌다. 다카이치는 아베가 2차 집권한 2014년 여성 최초로 총무상에 올라 ‘최장 재임’ 기록을 세우는 등 각종 ‘여성 최초’ 타이틀을 달고 다녔다.

하지만 ‘여성 정책’은 전혀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여성을 ‘아기 낳는 기계’에 비유하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바 있고 남자만 왕위를 잇게 하는 현행 왕위 제도나 결혼하면 여성이 사실상 남성의 성(姓)을 따르도록 한 부부동성(同姓)제 개정에도 반대한다. 최대 파벌 호소다파 전신에 소속돼있다가 반기를 들고 뛰쳐나온 전력도 있어, 파벌 단위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회의론도 크다.

현재 차기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가장 주목받는 건 고노 행정규제개혁상이다. 소속 파벌 수장인 아소 다로 재무상에게 출마 의사를 밝히고 추천 의원 20명을 모으고 있다. 아소파는 자민당 내 두 번째 파벌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총리 적합 인물 1·2위를 늘 오르내릴 정도로 대중 인기도 높고, 도장·팩스 폐지와 같은 개혁 정책과 백신 보급 정책으로 주목도가 높다. 이 때문에 정치 기반이 약한 젊은 의원들의 지지가 모인다. 고노 개혁상이 총재가 되면 자신들의 올가을 중의원 선거 운동에 도움이 될 것이란 판단이다.

일찌감치 출마 선언을 한 기시다 전 외무상은 스가 총리의 사퇴로 입지가 좁아졌다는 평가다. 당초 젊은 의원들이 “스가 총리만 아니면 누구라도 좋다”며 기시다 전 외무상을 지지하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이젠 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기시다 전 외무상은 5일 당내 보수파를 의식하는 듯한 ‘자위대법 개정안’ 공약을 내놓았다. 대중 인기가 높은 이시바 자민당 전 간사장도 실세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을 찾아가는 등 세를 모으고 있다.

교도통신이 4일부터 이틀간 일본 유권자 1071명을 대상으로 차기 총리 선호도를 묻는 여론조사에선 고노(31.9%), 이시바(26.6%), 기시다(18.8%), 노다 세이코 간사장대행(4.4%), 다카이치(4.0%) 순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로만 보면 고노가 가장 앞서 있지만, 앞으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예측 불허다.

자민당 총재는 자민당 소속 의원과 당원 등의 투표로 선출되는 만큼, 각 파벌과 거물 정치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민 여론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어 국민 대상 여론조사는 참고 자료에 불과하다. 실제 이시바 전 간사장은 지난해 1월부터 8개월간 모든 여론조사의 ‘포스트 아베로 적합한 차기 총리 후보’ 항목에서 30% 안팎의 지지율로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호소다파, 아소파 등 자민당 거대 파벌들의 밀실야합으로 스가 현 총리가 낙점돼 그해 9월 총재 선거 때엔 스가 총리와 기시다 전 외무상에 밀려 꼴찌(3위)를 하는 수모를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