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본 외교관이 사건 직후 친구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새로 발견됐다고 아사히신문이 16일 보도했다./아사히신문 홈페이지 캡처

16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을미사변 당시 조선에 영사관보(補)로 머물던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가 발송한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 8통이 최근 새로 발견됐다. 호리구치는 당시 외교관·경찰·민간인 등으로 구성된 을미사변 실행그룹의 일원이다.

이번에 새로 발견된 호리구치의 편지는 1894년 11월 17일부터 을미사변 이후인 1895년 10월 17일까지 총 8차례에 걸쳐 발송됐다. 받는 사람은 일본 니가타현 나카도리무라(지금의 나가오카시)의 한학자이자, 호리구치의 친구 다케이시 데이쇼(武石貞松)다.

아사히는 이중 명성황후 시해 다음날인 1895년 10월 9일자 편지가 다른 것들과 달리 이중으로 동봉돼 있으며, 현장에서 호리구치가 자행한 행동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고 보도했다.

구체적인 내용도 일부 공개됐다. ‘담을 넘어(중략) 간신히 오쿠고텐(奧御殿·일본 저택 안쪽의 침실·부인 생활 공간 등을 지칭)에 도달해 왕비를 시해했다’며 을미사변 가담 사실을 밝히는 내용이 포함됐다. 또 ‘의외로 쉬워 도리어 놀랐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도 적어뒀다고 한다.

해당 편지는 일본 나고야시에 사는 미국계 일본인 스티브 하세가와(長谷川·77)가 골동품 시장에서 발견했다. 붓으로 흐려쓴 글씨는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이라는 저서를 쓴 재일 사학자 김문자씨가 판독했다.

김씨는 “사건의 세부(내용)이나 가족에 관한 기술 등을 보았을 때 본인의 진필이 틀림없다”며 “현역 외교관이 부임지 왕비 살해에 직접 관여했다고 알리는 내용에 새삼 놀랐다”고 아사히에 말했다. 또 “아직 불분명한 부분이 많은 사건 세부 사항을 밝히는 열쇠가 될 가치가 높은 자료”라고 평가했다.

일본 근대사에 정통한 나카쓰카 아키라(中塚明) 나라여대 명예교수 역시 “일본이 한반도에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 사건 후 120여년이 지나 당사자가 쓴 1차 자료가 발견된 건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일본 육군 출신 미우라 고로(三浦梧櫻) 당시 공사의 주도 아래 군인, 외교관, 민간인 등이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다. 당시 실행그룹에 가담한 일본인들은 일본 재판에 회부됐지만,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처벌은 받지 않았다. 호리구치 역시 1년 정직 처분을 받는데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