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계 최고 실력자인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총탄을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 일본 사회가 큰 충격에 빠졌다. 총기 보유가 금지된 일본에서 식칼과 같은 흉기를 사용한 ‘묻지 마’ 살인 사건이 간혹 사회문제가 돼 왔지만, 총기 사건은 상상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총기 안전 국가라는 일본의 자부심도 한순간에 무너졌다는 자탄이 나오고 있다. 여당인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의 수장인 아베 전 총리의 사망은 당장 10일 실시되는 참의원 선거는 물론, 향후 일본 정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아베 전 총리가 피격된 것은 8일 오전 11시 30분. 참의원 선거 유세 도중이었기 때문에 아베 전 총리의 주변에는 상당수 시민이 몰려 있었다. 아베 전 총리 뒤편에서 ‘탕’ ‘탕’ 두 발의 총탄이 날아왔다. 총격 영상을 보면 첫 총성 직후엔 아베 전 총리 본인도 무심하게 뒤를 돌아보고 주변 사람들도 큰 반응이 없었다. 사건 목격자는 NHK에 “첫 총탄 소리가 울려 장난감 (권총) 소리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총격 소리가 들리고 아베 전 총리가 쓰러졌다”고 말했다. 영상에는 꽤 많은 하얀 연기가 보였다. 살인 용의자인 야마가미 데쓰야는 아베 전 총리 뒤편 4~5m에서 조준 사격을 하는 것처럼 선 채로 접근하면서 2발을 연속으로 쐈다.
흉기는 용의자가 제작한 사제 총이었다. 검정 테이프로 꽁꽁 싸인 총구 2개짜리 조악한 모양이었지만, 전직 해상자위대원인 용의자는 가까운 거리에서 한 발을 심장에 명중시켜 치명상을 입혔다.
일본 언론은 전직 총리가 많은 인파 속에서 사실상 무방비였던 대목을 부각시키고 있다. 경찰 경호원들은 인파가 모인 앞쪽만 보고 있을 뿐 뒤편에 대한 경비는 소홀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일본 경시청은 “현장의 경호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엄중하게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베 전 총리의 피습과 사망에 대한 일본인의 충격은 이날 하루 종일 소셜미디어(SNS)와 포털, 뉴스사이트를 도배했다. 피격 사실이 알려진 11시 50분 이후에 일본의 포털인 야후재팬에선 주요 뉴스 8건이 모두 아베 전 총리 피격 관련 뉴스였다. 소셜미디어(SNS) 트위터는 물론이고 마이니치신문·요미우리신문·아사히신문 등 주요 신문사 사이트는 “탕, 탕, 두 발의 총성에 쓰러져... 심폐 정지 상태” “용의자는 41세에 해상자위대 출신” “구급차! 구급차! 의료 관계자 도와주세요! 아베씨 총격의 현장” “민주주의 파괴 행위, 여야에서 분노의 목소리”와 같은 뉴스가 올라왔다. 아베 전 총리의 인스타그램에는 “당신의 지지자는 아니지만 살아달라, 아직 당신이 필요하다”와 같은 응원 댓글 1만1000여 개가 달렸다.
참의원 선거로 서로를 비판하던 일본의 여야(與野) 정당은 분노의 한목소리를 내며 선거운동을 중단했다. 우리나라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호소다 중의원 의장은 “의원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며, 비열한 행위에 강한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야당인 입헌민주당의 이즈미 대표는 “민주주의 국가인 일본에선 있어선 안 될 일”이라며 “고 아베 전 총리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일본공산당의 시이 위원장도 “자유로운 언론을 테러로 말살하려는 행위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며 “폭력에 민주주의가 굴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시다 정부는 이날 사건 발생 직후, 총리를 포함한 각료 전원을 총리 관저에 집결시켰다. 일본 각료 거의 전원은 지역에 흩어져, 10일 예정된 참의원 선거의 응원 유세 활동을 벌이다가 모두 상경, 대책을 논의했다. 기시다 총리는 이후 “자유와 공정한 선거는 절대로 지켜나가겠다”고 했다. 참의원 선거는 예정대로 10일 실시되며 마지막 유세일인 9일 선거운동이 정상적으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