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국과 일본의 외교 장관이 첫 양자 회담을 했다. 18일 도쿄를 방문한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일본 외무성의 이이쿠라(飯倉) 공관에서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외무상을 만나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공동 대응과 징용 피해자 문제, 지소미아(GSOMIA·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운영 정상화, 백색 리스트(일본의 수출 심사 우대국 명단) 복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등 주요 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이어진 만찬에선 윤석열 정부와 기시다 내각 간 소통 강화를 논의하는 등 총 2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눴다. 박 장관은 19일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만나 “윤석열 대통령이 한·일 관계 개선 의지를 갖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예정이다. 박 장관은 또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도쿄 자택이나 자민당사를 방문해 조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오후 4시 박 장관과 하야시 외무상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회담장에 나타났다. 기자들 질문에도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일본의 한 기자는 “양국 관계가 엄중한 만큼, 회담 전 발언을 자제키로 사전에 합의했다”고 전했다. 같은 시각, 회담장 밖 길거리에선 ‘다케시마(독도를 지칭하는 일본식 표현)는 일본 땅’이란 현수막을 건 차량에서 대형 마이크로 “한국을 믿지 말라”는 방송이 나왔다. 회담 후, 한국 정부 관계자는 “두 장관이 허심탄회하게 대화했고 앞으로 외교 장관 간 셔틀 외교가 본격 시작될 것”이라며 “적절한 시기에 양국 정상회담도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번 회담에서 최대 현안인 징용 피해자의 배상 문제에 대해 박 장관은 “강제 징용 피해자의 배상 문제를 풀기 위해 민관 협의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일본 기업의 자산 매각 같은 ‘현금화’가 이뤄지기 전에 해법을 찾아보자”는 입장을 전했다고 한다. 징용 배상 문제는 피해자의 고령화와 자산 현금화라는 시한이 있는 사안인 만큼, 진지하게 해법을 공유하자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 외무성도 회담이 끝난 후 발표한 보도자료를 통해 이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고 밝혔다. 하야시 외무상은 ‘징용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한국이 제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다시 강조하면서도 한국의 노력에 감사를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관련, 양측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앞으로 당시 합의 정신에 따라 위안부 피해자들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조치를 서로 조율해 추진하자는 원칙론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북한 도발에 대한 억지력을 높이기 위해 한·일 간 군사 정보의 원활한 교류를 더 확고히 한다는 데도 합의했다. 문재인 정권 때 유명무실해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완전한 형태로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한 것이다. 외교 당국자는 “한국과 일본이 북핵과 같은 도발에 대해선 똑같은 입장이라는 것을 재확인했다”고 말했다.
3년 전 아베 전 내각이 주도한 반도체 부품 등의 대한(對韓) 수출 규제를 푸는 문제도 논의됐다. 박 장관은 “한국을 수출 심사 우대국 명단인 백색 리스트에서 제외한 조치는 명분이 없으니 취소해 달라”는 입장을 전했다. 하야시 외무상은 이에 대해 향후 지속적인 협의를 하자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 간 무(無)비자 문제는 다소 난항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측은 “상호 무비자 실시를 추진하자”고 제안했지만 일본은 최근 코로나 확진자 급증을 이유로 난색을 표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이 선제적으로 일본인에게 무비자를 줄 가능성도 일부에선 거론된다. 아베 전 총리의 총격 사망과 관련, 박 장관은 상심을 담은 조의를 전달했고 하야시 외무상은 감사의 말로 화답했다. 한·일 관계에 정통한 외교 소식통은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첫 한·일 외무 장관 회담은 과거와는 달라진 양국 관계를 보여줬다”며 “예전처럼 한쪽이 일방적으로 상대편에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방식에서 탈피하고 양국 현안을 진지하게 논의한 것이 성과”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