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경제) 위기가 영국보다 심각하다.”

지난18일 일본 도쿄 시내의 환율 전광판에 엔화와 미국 달러화 환율이 게시되고 있다. 전날 뉴욕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장중 달러당 149엔을 돌파했다.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49엔대까지 치솟은 것은 이른바 '거품(버블) 경제' 후반이던 1990년 8월 이후 32년 만에 처음이다./AFP 연합뉴스

일본 니혼게이자이(닛케이) 신문이 26일 일본이 경제는 물론, 정권의 재정 운영 능력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강하게 경고했다. 최근 영국에서 자국뿐 아니라 전 세계 금융에 충격을 준 리즈 트러스 총리가 44일 만에 실각하는 등 위기가 부각됐지만, 실제로는 일본 상황이 훨씬 더 나쁘다는 것이다. 닛케이는 “국가 재정의 빚은 당장이든, 조금 먼 미래이든, 결국 세금이란 이름으로 국민 부담으로 돌아온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며 “눈앞의 돈이 아닌, 장기적인 시야를 가지고 정부에 제대로 하라고 압박하지 않으면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올지 모른다”고 했다.

마이니치 신문도 “최근 상황은 일본 경제의 구조적인 약점이 드러난 것”이라며 “대증 요법이 아니라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다시 세우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아사히 신문은 “그동안 금융 완화, 재정 지출 등으로 대량의 돈이 시장에 공급돼 본래 시장에서 퇴출됐어야 할 기업이 살아남아 경제 선순환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본과 영국 경제

일본의 대표적인 신문들이 이같이 지적할 정도로 일본의 경제 상황은 영국보다 더 좋지 않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2차 대전 이후 최악”이라고 한탄한다. 일본의 국가 부채는 1255조엔(약 1경1800조원)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252.6%에 달한다. 영국은 2조3654억파운드(약 3870조원)로 GDP 대비 99.6%인 점을 감안하면, 2.5배다. 9월 소비자물가지수는 3% 상승해 2014년 소비세율 인상에 따른 일시적 물가 상승 시기를 제외하면, 1991년 8월 이후 31년 1개월 만에 최고치다.

엔화 가치의 끝없는 추락이 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지난 21일 엔화는 달러당 151엔까지 하락했다. 거품 경제 막바지였던 1990년 8월 이후 32년 만에 최악이다. 올 초에 비해 30% 추락했다. 영국 파운드도 달러 대비 가치가 떨어지긴 했지만, 가장 낮았을 때도 올 초보다 20% 하락한 수준이었다. 원자재, 식료품 등 수입 가격이 급등하다 보니, 임금이 많이 오르지 않은 일본 국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더욱 심각한 건 기시다 내각이 이런 상황을 뒤집을 능력과 의지, 정책 수단이 사실상 없다는 점이다. 영국 트러스 전 총리는 지난달 집권 직후에 450억파운드(약 72조원) 규모의 감세안을 밀어붙였다. 가구당 400파운드(약 64만원)씩 에너지 보조금을 주는 선심성 정책도 내세웠다. 일본도 올해 석유 등 에너지 가격 대책에 6조2000억엔(약 60조9000억원)을 썼고, 내년엔 4조2000억엔을 더 투입해 전기·가스요금을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여행을 가면 1박에 최대 1만1000엔을 주고 전 국민에게 코로나 지원금을 10만엔씩 지급하기도 했다.

일본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국채를 찍어 자금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일본 국채가 시장경제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국은 감세 정책 발표 직후 국채 금리가 폭등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행은 자국의 10년물 국채가 금리 0.25%를 넘으면 무제한 구매하는 통화정책을 실시 중이다. 국채 금리를 인위적으로 제로로 맞춘 것이다. 닛케이는 “영국에서 작동한 ‘채권 금리 급등’이라는 경제 경고음이 일본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일본의 ‘퍼주기 정책’은 역설적으로 서민들 고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엔저 탓에 상대적으로 값싸진 일본 도심의 부동산을 해외 자본이 구매하면서 서민들이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다. 특히 교토는 중국 자본의 먹잇감이 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중화권에서 이용하는 일본 부동산 소개앱 ‘선쥐먀오쏸(神居秒算)’에는 수천만엔에서 1억엔을 호가하는 일본 아파트와 단독주택, 별장 등이 즐비하다. 이 앱의 자오제이 대표는 최근 간사이TV에 출연해 “일본 부동산이 선진국 중 가장 가격이 싼데, 최근 엔화 환율을 고려하면 거의 바겐세일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교토신문은 “중국인들은 대부분 대출 없이 한 번에 부동산을 구입하고 일본에 오지 않고 계약하는 사람도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경제력이 약한 젊은 세대가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다. 교토시 인구는 올해 138만8807명으로 지난해보다 1만1913명 감소했다. 2년 연속 인구 감소가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NHK는 “교토는 작년 1년간 20~30대 전출 인구가 많았다”며 “젊은 세대의 유출 원인은 교토 주택 가격 상승의 영향이 크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