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일본 정부가 발행한 국채의 절반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채의 절반 이상을 중앙은행이 사들여 보유한다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일본은행의 국채 보유 비율은 10년 전엔 10%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은 일본 금융 정책의 핵심인 ‘저금리’를 유지하기 위해 국채가 발행될 때마다 무조건적으로 사들였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일본은행이 지난 19일 발표한 2022년 3분기 자금순환통계에 따르면 9월 말 현재 단기채권을 제외한 국채 발행 잔액 1065조6000억엔(약 1경359조원) 중에서 일본은행 보유분은 535조6000억엔(약 5209조2992억원)에 달했다. 전체 잔액의 50.26%로 이 비율이 절반을 넘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6월 말에는 49.6%였다.
일본은행의 국채 보유 비율은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대단히 비정상적이다. 올 초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의 국채 보유 비율은 20%였고 유럽중앙은행(ECB)도 30% 수준이었다. 일본은행의 대량 국채 매입은 일본 정부가 ‘제로(0)’에 가까운 ‘초저금리’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돈을 풀어 경기를 활성화한다’는 아베노믹스 정책에 따라 국채를 마구 찍었고 일본은행은 시장에 통화량을 풀어 심각한 저물가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국채를 있는 대로 사들였다.
문제는 돈이 시장에 계속 풀리면서 물가 상승이 예상치를 넘어버린 것이다. 일본의 10월 소비자물가는 작년 같은 달보다 3.6% 올라 40년 8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세계적인 물가 상승에 미국과 유럽이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제로금리를 고수했던 엔화의 가치는 역대 가장 낮은 수준까지 폭락했다.
게다가 재정정책과 금융정책의 견제·균형이라는 대원칙도 무너져버렸다. 심승규 아오야마가쿠인대학 국제정치경제학부 교수는 “일본은행이 실질적으로 정부의 재정정책을 보조하는 역할로 전락했다”며 “중앙은행으로서 신뢰도를 스스로 실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선 재정·금융 정책을 바꾸는 것도 어려워진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아무리 정부가 빚을 늘려도 일본은행이 국채를 인수해준다는 인식이 시장에 확산하고 있다”면서 “이제 일본은행은 대규모 완화를 그만두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양적 완화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금융 정책이 전환됐을 때 금리가 오르면 거액의 손해가 발생해 금융시장을 교란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은행이 금리를 인상하게 되면 정부의 국채 이자 부담이 급격히 늘어나기 때문이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금리 1%가 오르면 정부의 국채 이자 부담은 2025년 기준 약 3조7000억엔 늘어난다.
하지만 물가가 심각할 정도로 치솟고 엔화 약세로 인한 무역 적자가 크게 늘자 일본은행은 금융 완화 정책을 일부 수정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은행은 20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10년물 국채 금리의 변동 폭을 기존 0.25%에서 0.5%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3월 확대 이후 1년 9개월 만에 다시 폭을 넓혔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이날 “금리 인상이나 금융 긴축을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시장에서는 사실상 초저금리 정책에서 벗어나려는 신호로 보고 있다. 그동안 일본은행은 변동 폭 이상으로 금리가 올라갈 움직임이 보이면 국채 매입을 통해 금리 인상을 억제했기 때문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사실상 금리를 인상해 엔화 약세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전했다. 실제로 이날 정책이 알려지면서 엔화 가치는 급등했다. 발표 이전 달러당 137엔에서 133엔대로 뛰어올랐다. 심승규 교수는 “구로다 총재의 임기가 끝나면 후임은 노선을 바꿀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이미 시장에서는 일본도 금리를 올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