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차세대 신규 원전을 폐로(閉爐)하는 원전 부지에 건설하고, 최대 60년의 현행 원전 운전 기간 제한을 사실상 없애는 정책을 채택했다. 일본 정부는 23일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주재한 GX(그린 트랜스포메이션) 실현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에너지) 기본 방침안을 승인했다. 총 22개 분야에서 2050년까지 탄소 제로를 구현하는 로드맵을 제시하면서 향후 10년간 정부와 민간을 합쳐 150조엔(약 1448조원)을 탈탄소 분야에 투자한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내년 초 각의에서 이를 의결하고, 자민당은 필요한 법률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기로 했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듬해인 2012년 신규 원전 금지와 원전 운전 기간을 제한하는 ‘원전 제로’ 정책을 추진해왔는데 11년 만에 원전 정책의 대전환에 나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날 통과된 기본 방침안에서는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원자력 발전을 활용한다”고 명기했다. 2050년 ‘탄소 배출량 제로’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원전을 ‘베이스 로드(Base Load) 전력원’으로 규정한 것이다. 베이스로드 전력원은 합리적인 비용으로, 밤낮이나 계절과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사회 인프라를 일컫는다.
일본 원전 정책 전환의 핵심은 폐로가 결정된 원자력발전소 부지에 차세대 원자로를 재건축하는 것이다. 일본은 2030년대에는 냉각재로 헬륨가스를 활용해 사고 시 수소 폭발을 막는 고온가스로(실증로)를, 2040년대에는 소형 모듈로(SMR)와 방사성 폐기물 배출량이 적은 고속로를 만들 계획이다.
상용 차기 신설 원자로의 유력 후보지는 후쿠이현에 있는 미하마(美浜) 원전과 쓰루가(敦賀發電所) 원전 부지다. 미하마 원전은 1·2호기는 폐로 결정, 3호기는 운전 정지 상태다. 쓰루가 원전도 1호는 폐로 결정, 2호는 정지 상태다. 일본에선 이에 앞서 24기의 원전에 대한 폐로 결정을 내렸다.
미하마촌의 도지마 히데키 촌장은 이날 “원자력이 미래에도 중요하고 불가결하다는 게 명확해졌다”며 “기존 원전의 리플레이(재건축)를 국가 에너지 기본계획에 반영해달라”고 요청했다. 후쿠이현의 스기모토 다쓰지 지사는 “정치적인 결단이 필요한 지점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일정한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기시다 총리는 “직면한 에너지 위기에 대응한 정책을 가속하기 위해 국민과 지역의 신뢰를 쌓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필요한 원전 정책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원전 운전 기간 연장은 일본의 원전 운영에 숨통을 틔워줄 전망이다. 일본은 정지 기간을 운전 기간에서 제외하는 방식으로 원전 운영기간을 늘리기로 했다. 즉, 언제 원전이 건설됐느냐가 아니라 그동안 얼마나 운영됐느냐에 따라서 폐로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일본 내 운전 가능한 원전 33기 가운데 14기가 가동 연수 40년이 지났다. 하지만 이중에는 장기간 안전 검사로 실제 가동은 30년만 한 경우가 적지 않아 정지 기간을 운전 기간에서 제외하면 일본 상당수 원전의 운전 기간이 70년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원전 정책 대전환은 장기적으로 석유나 천연가스에 의존하는 화력발전에서 완전 탈피하기 위해서다.
기시다 정부는 2050년까지 탄소 제로를 구현하기 위해 ‘GX 경제이행국채’(가칭)라는 신규 국채를 만들어 10년간 20조엔(약 193조원)을 발행하기로 했다. 여기서 재원을 마련해 민간 투자를 촉진하는 마중물로 쓸 방침이다. 분야별로는 원자력을 포함한 비화석 에너지 확대에 6조~8조엔, 전기자동차·배터리와 같은 에너지 절약 기술에 9조~12조엔, 자원 순환 기술 등에 2조~4조엔을 쓸 예정이다. 막대한 국채 발행금을 향후 상환하는 비용은 탄소를 배출하는 기업에서 ‘카본 프라이싱(탄소 가격)’이란 부담금으로 걷을 예정이다. 2028년부터 석유를 수입하거나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매년 부담금을 늘릴 예정이다. 민간 산업계에 ‘돈을 내기 싫으면 탈탄소에 투자하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