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 ‘(피고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은 어떠한 형태의 피해 보상에도 참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최종 결정해 우리 정부와 협상이 막판 진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1일 알려졌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정부 산하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배상금(판결금)을 우선 변제하고, 피고 기업을 포함한 일본 기업이 자발적으로 재단에 기부하는 방식으로 ‘성의 있는 호응’을 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이를 거절한 것이다. 이에 따라 윤석열 정부는 일본의 피고 기업의 참여가 없는 형태로 피해자 보상을 진행하거나,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장기 미제로 두고 일본 측과 추가 협상할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징용 문제에 정통한 한일 관계자들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은 최근 피고 기업의 재단 기부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정했다. 이후 한국 정부가 피고 기업의 자회사를 통한 기부를 타진했지만, 그것도 수용하지 않기로 내부적으로 결론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피고 기업이 어떤 형태로든 재단에 돈을 갹출하면 한국 대법원 판결을 인정,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이 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은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상을 통해 모두 해결됐다고 보고 있다.
일본 정부는 그 대신 일본 경제 단체인 게이단렌(經團連)의 자발적인 기부 참여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게이단렌이 기부할 경우에도 우리 정부 산하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는 기부할 수 없다는 조건을 달았다.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는 합법적으로 이뤄졌고, 징용은 당시 모든 일본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라며 ‘일제강제동원’ 명칭을 가진 재단에는 기부할 수 없고, 새로운 재단을 만들어야 기부금 출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도쿄의 한 소식통은 “윤석열 정부가 징용 문제 해결을 서두르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 정부가 이를 악용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본 기시다 내각 내부에선 징용 문제를 해결해도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해제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니시무라 야스토시 경제산업상은 최근 “수출 규제는 안전 보장의 관점에서 수출 관리를 적절히 하기 위한 것”이라며 “근로자의 문제(징용 피해자 문제)와는 전혀 다른 논의”라고 말했다. 2018년 말 한국 대법원이 일본 기업에 한국 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자, 2019년 7월 당시 아베 신조 총리는 보복 조치로 반도체 소재 3종의 한국 수출을 규제했다. “징용 문제가 풀리면 수출 규제도 같이 해결될 문제(외교부 고위 당국자)”라는 한국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다.
일본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우리 정부 안팎에서는 ‘서두를 필요 없다’는 현실론이 나오고 있다. 한·미·일 안보 협력을 중시하는 윤 대통령이 한일 관계 개선에 의욕을 보이는데, 일본 측이 이를 악용하려는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일 협상을 잘 아는 관계자는 “우리가 조급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며 “대법원 판결에 따른 현금화만 피할 수 있다면 장기 협상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북한의 도발과 중국의 대만 위협 등 한·미·일 안보 협력이 중요하지만, 한국으로선 관계 개선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일본의 변화를 지켜보자는 것이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도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 행정상 불편을 줄 뿐, 큰 피해를 주지는 않는 상황이다. 미국이 한·미·일·대만 간 반도체 공급망 분야에서 협력하자고 요구하는 상황에서 일본이 한국의 반도체 제조를 ‘방해’하는 상황이 비정상으로 비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