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부가 이르면 6일 징용 문제와 관련한 일본 피고 기업을 대신해 산하 재단이 배상금을 변제하는 방안을 확정·발표하는 데 대해 일본 언론 매체들은 “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지 않는다는 일관된 일본의 원칙을 지켜냈다”며 환영하는 분위기다. 일본 정부 안팎에서는 징용 문제와 관련, 일본의 입장이 사실상 관철됐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가운데, 한국이 조건 없이 양보한 만큼 일본도 대승적인 관점에서 한일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5일 일본 언론과 현지 소식통 등에 따르면, 기시다 후미오 내각과 외무성은 한국의 결정이 ‘1965년 일한 청구권 협정에 의해 징용공(징용 피해자의 일본식 표현) 배상 문제는 모두 소멸했다’는 원칙을 수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이날 ‘징용공 배상금, 일본의 경제 협력으로 은혜 입은 기업이 기부금 갹출’이라는 제목을 달아 1면 기사로 보도했다. 이 신문은 “한국 정부 산하의 재단이 배상금에 상당하는 금액을 징용공에게 지불한다”며 “자금은 한국 철강 회사인 포스코 등의 기부금으로 마련하는데, 포스코는 1965년 일한 청구권·경제 협력 협정에 따른 일본 경제협력의 은혜를 입은 기업”이라고 보도했다. 이 보도엔 일본은 피고 기업을 통해 한국의 경제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일본 산케이신문도 “일본 정부는 징용공 문제가 1965년 일한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문제라는 입장을 일관되게 관철한 반면, 한국에서는 원고(징용 피해자를 지칭) 측이 일본의 사죄와 피고 기업의 배상 참여를 강하게 요구했다”며 “일본 정부가 피고 기업의 배상 참여를 거절하자 한국은 먼저 해결책을 발표하고 일본 측에 ‘성의 있는 호응’을 재촉하자는 방침으로 기울었다”고 전했다.
일본 언론 매체들은 우리 정부의 징용 해결책 발표에 맞춰 곧바로 대(對)한국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해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본은 2018년 말 우리 대법원이 일본 기업에 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자, 이듬해 7월 반도체 소재 3종의 수출을 규제하고 8월에는 수출관리 우대 대상국인 ‘화이트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이와 관련, 일본은 6일 우리 정부의 발표 직후에 이같은 규제를 해소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할 것이라고 도쿄의 주요 소식통들이 전했다. 우리 정부가 일본의 규제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취하하면 일본도 수출 규제를 끝낸다는 것이다. 또, 같은 날 일본 정부의 고위급 관계자가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나 2015년 아베 담화 등을 언급하는 방식으로 일본 정부의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표명할 예정이다.
한국 대법원에서 패소해 배상 책임을 져야 하는 당사자인 일본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은 이날 입장을 발표하진 않았다. 교도통신의 5일 보도에 따르면 미쓰비시중공업은 이날 “한국 국내의 움직임에 관해선 언급할 입장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일본제철은 아예 답변을 회피했다. 지난달에도 피고 기업들은 일본 아사히신문의 취재에 “이 문제는 일한 청구권 협정에 따라 해결된 사안이며 정부와 연계해 대응하겠다”(미쓰비시중공업), “양국 간 협의가 진행되고 있는 사안에는 코멘트하지 않겠다”(일본제철)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일본에서는 기시다 내각이 징용 문제와 관련,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한국이 양보한 데 대한 부담도 느끼는 분위기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지난 2일 사설에서 “기시다 총리는 (징용 피해자 문제에 대해) 외교 당국의 노력을 지켜볼 생각이라고 반복하는 데 그쳤는데 일본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검토해 줬으면 한다. 총리가 지도력을 발휘할 때다”라고 썼다. 한국 정부가 통 큰 결단을 내린 만큼, 오는 5월 19∼21일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국(G7) 정상회의에 윤 대통령을 초청하는 등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위해 배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윤 대통령의 결단을 높이 평가하기보다는 “외교와 협상에 능숙하지 않은 약점이 있다”며 앞으로 군함도·사도광산,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문제 등에서 한국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일본 시민 단체의 한 관계자는 “한국 정부가 동북아시아의 평화라는 큰 틀을 우선해 자국 내 여론 리스크에도 먼저 손을 내미는데 일본 정부는 4월 지방선거의 유불리만 따지며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며 “강경파의 눈치를 보는 현재 기시다 총리의 입지가 변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일본 정부의 양보를 바라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