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사회를 대표하는 재일대한민국민단(민단)의 여건이(呂健二) 단장은 10일 “한국에서 일본 욕을 하고 반대한다고 말하면 기분이 후련하겠지만, 그 피해를 누가 받을까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라며 “현해탄 건너편에서 던진 돌은 일본인에게 가는 게 아니라, 재일교포들이 맞는다”고 말했다. 10일 도쿄의 민단 본부에서 만난 여 단장은 “한일 관계는 재일교포에게는 생사가 달린 문제다. 양국이 좋을 때는 살기 편하지만, 나빠지면 바보들(혐한론자를 지칭)의 힘이 세지고 우리 아이들은 괴롭힘을 당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우리 정부가 최근 양국 간 최대 현안이었던 일제강점기 징용 피해 배상 문제의 해법을 발표한 뒤, 한국 내에서 반일(反日) 여론이 다시 일고, 일본에서도 맞대응으로 혐한(嫌韓) 분위기가 커지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여건이 민단 단장.

일본에서 뿌리를 한국에 둔 재일 한국인은 일본 국적자를 포함, 최대 400만명으로 추산한다. 이 중에서 한국 국적 보유자는 약 50만 명이다. 민단은 우리 정부의 징용 해법 발표와 관련, “악화된 한일 관계를 개선할 큰 계기”라며 “일본 정부도 양국 간 건전한 미래 지향적인 관계 구축을 위해 성의 있는 대응을 할 것을 기대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여 단장은 “항상 걱정되는 건, 우리 아이들”이라며 “지금은 나아지긴 했지만, 나도 어렸을 때 ‘마늘냄새 나는 조센징’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지나친 반일 때문에 일본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에서 반일을 외치는 사람들은 재일 한국인의 아픔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근 도쿠시마의 민단 건물에 협박장을 보낸 일본인이 경찰에 잡혔는데, 일본 검찰은 ‘기소유예’로 끝내려고 해서 민단이 강하게 항의하고 있습니다. ‘반일정책을 지속한다면 실탄을 가지고 와서 정화하겠다’는 무서운 협박장인데도 말입니다.”

6년 전 문재인 당시 정권이 한일 간 위안부 합의를 번복하고 한국 대법원이 일본 피고 기업에 징용 배상 판결을 내리자, 일본 내 혐한 세력이 득세하면서 재일 한국인의 삶은 더 고달파졌다. 그는 “일본에는 참정당과 같은 진짜 우익들이 활동하는 정당이 생겼고 거리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헤이트스피치(hate speech·특정 민족·인종에 대한 증오 발언)를 하는 게 현실”이라며 “이번 해법 제시를 계기로 두 나라가 국가 간 보통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재일교포 2세로 1948년 이시카와현에서 태어난 여 단장은 “(징용 문제를 풀자는 사람을) 친일파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재일교포도 친일파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20대 초부터 지금까지 50년간 민단에서 활동한 그는 “우린 친일도 아니고, 반일도 아니다”라며 “일본 땅에서 반일하면서 살지 못하지만, 당연히 일제 식민지 시대가 잘못됐다는 걸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좌파는 무슨 파라고 레테르 붙여 놓고 비난만 하는데 (지금 시대에) 그들이 말하는 친일파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도 했다.

여건이 재일대한민국민단 단장. /성호철 특파원

여 단장은 “그렇다면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조용히 산 사람들은 친일파가 되고 미국에 사는 재미교포들은 모두 친미파가 된다는 논리인가”라며 반문한 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때 일본에서 받은 돈으로 경제를 일으킨 우리 할아버지·할머니는 무엇인가. 이제 (친일파 논란도) 졸업했으면 한다”고 했다. 그는 “간편하게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도 했다.

여 단장은 “역사나 외교는 어느 쪽이 이기고 지는 게 아니라, 둘 다 ‘지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 아니냐”며 “상대방을 굴복시키겠다면 전쟁을 해야 하는 거냐”고 했다. 그는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이 ‘아파르트 헤이트(유색 인종 격리 정책)를 절대 잊지 말자. 그렇지만 용서는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듣기 좋으라고 한 말만은 아닐 것”이라며 “일본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중국, 일본과 함께 스모의 요코즈나(최상위 강자그룹)급”이라며 “이제 용서해도 될 정도로 한국도 강한 국가가 됐다”고도 했다.

한일 관계가 잘 안 풀리는 이유에 대해선 “양국이 상대방의 문화·특성을 잘 모른다”고 했다. 그는 “일본은 서로의 잘잘못은 물에 흘려보내는 문화”라며 “전쟁에서 서로 죽이던 관계라도, 사죄할 때 한 번 받아들이면 모든 걸 흘려보내고 재차 문제 삼지 않는다”고 말했다. 섬나라라는 지형적인 특성 탓에 인간관계를 완전히 끊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 문화라는 것이다. 예컨대 일본 장기처럼 상대편 말을 잡으면, 자기편 말로 다시 쓰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게 섬나라라는 설명이다.

여 단장은 “이런 문화가 세계에서도 통용된다고 믿는 일본인들로선 식민지 시대를 사과했는데도 한국이 왜 ‘물에 흘려보내지’ 않고 계속 사죄를 요구하는지 이해를 못 한다”며 “일본인들 사이에 ‘한국은 이상한 나라’라는 분위기가 생기는 이유”라고 했다. 반면 한국은 민중의 여론이면 무엇이든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 일본도 잘못됐으니 강제로라도 고치겠다는 심리가 있다고 봤다. 그는 “한국은 1960년 4·19 때 민중의 힘으로 정권을 바꾼 뒤, 그런 믿음이 생겼다”며 “하지만 한국 민중이 움직인다고 (일본이 우리 마음대로 움직이는)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 단장은 오는 17일 재일한국인들이 일본 피고 기업을 대신해 징용 피해자에게 판결금을 지급할 재단에 기부하는 운동에 개인 자격으로 동참한다. 그는 “한일 관계를 개선해 우리 아이들이 자존감을 갖고 일본에서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