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3일 일본에서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치러진다. 중의원(하원) 네 곳과 참의원(상원) 한 곳이다. 자민당의 압승이 예상되는 보궐선거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은 ‘야마구치 2선거구’다. 이번 선거에서 이목이 가장 집중되는 후보인 31살 정치 신인 기시 노부치요(岸信千世·이하 노부치요)가 출마한다. 그의 경력은 ‘전 후지TV 사회부 기자’가 전부이지만, 일본의 최고 정치 명문인 아베가(家)와 기시가의 명맥을 잇는 유일한 후계자의 정계 진출이라는 점이 큰 화제다.
지난달 27일 저녁 노부치요 후보가 도쿄의 더캐피털호텔도큐에서 연 정치 자금 모금 파티에는 500석 전석이 매진됐다. 참가비 2만엔(약 20만원)인 후원 모임이었다. 지방에서 출마하는 정치 신인이 도쿄에서 후원회를 여는 것도 이례적인데, 참가자 리스트가 매우 화려했다. 자민당의 아소 다로 부총재(전 총리)가 축사를 맡아 “야마구치현은 총리가 많이 나온 곳이니, 기시 노부치요도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가로 성장했으면 한다”고 덕담을 했다. 자민당 최대 파벌인 아베파의 시오노야 류(塩谷立) 회장 대리, 마쓰노 히로카즈(松野博一) 관방장관,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후생노동상, 니시무라 아키히로(西村明宏) 환경상 등 현직 대신(장관)들도 대거 참석했다. 노부치요는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두 분의 뜻을 잘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큰아버지는 아베 신조 전 총리, 아버지는 기시 노부오 전 방위상이다.
노부치요의 뿌리는 일본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극적인 정치인으로 꼽히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증조부로, 전후 A급 전범으로 몰렸다가 56·57대 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이자 노부치요의 증조숙부는 ‘핵무기를 만들지도, 갖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비핵 3원칙’을 내세운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전 총리였다.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는 본래 ‘사토’가의 아들로 야마구치의 재력가인 기시가의 사위로 들어가 아내 성을 따라, 형제의 성이 달라졌다.
기시 전 총리의 사위는 역시 유명 정치인인 아베 신타로 전 외무상이며, 그의 아들이자 기시 전 총리가 아끼던 외손자가 지난해 7월 유세 도중 피격당해 사망한 아베 전 총리였다. 대가 끊긴 기시 가문의 양자로 간 기시 전 방위상은 아베 전 총리의 친동생이다. 아베 전 총리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이제 기시·아베 양쪽 가문의 후계자는 노부치요 단 한 명만 남아 있다. 노부치요는 28살 때 방위상인 아버지의 정무비서관을 맡아 후계를 준비했다.
지난달 노부치요는 홈페이지에 이런 가족사를 담은 가계도를 올렸다. 다른 경력이 일천한 그가 ‘정치 금수저’임을 적나라하게 홍보한 것이다. 이 가계도엔 전 총리 3명을 포함해 중의원 6명이 등장했다. 당시 트위터 등에선 “정치 세습을 노골적으로 자랑한다”는 비판 여론이 들끓었고 그는 결국 가계도를 내렸다. 보궐선거의 경쟁자인 무소속 히라오카 히데오 전 법무상(69)은 “정치 세습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를 끊기 위해서 출마한다”고 말했다.
그가 출마하는 야마구치현(옛 조슈)은 기시·아베 가문의 정치적 기반인 동시에 일본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메이지 유신’의 본거지로 의미가 깊다. 야마구치현에선 “노부치요가 2선, 3선으로 경험을 쌓고 정무관·부대신·대신의 길을 걸으며 아베 전 총리의 뒤를 이을 큰 정치인이 될 것”이란 기대감이 크다.
그 길이 기대만큼 순탄할지는 미지수다. 일본 보수의 성지인 야마구치현엔 아베·기시 가문 말고도 유명 정치 가문이 또 하나 있다. 현직 외무상인 하야시 요시마사 중의원이 있는 하야시 가문이다. 아사히신문은 “이 지역의 기업·단체들은 수십년간 아베계와 하야시계 후원회로 양분됐고 다른 후원회 쪽 기업과는 거래를 하지 않을 정도로 분열돼 있다”라고 보도했다.
야마구치현엔 4개 선거구가 있다. 그동안 아베 전 총리는 시모노세키시(市)를 포함한 야마구치 4선거구를, 건강 문제로 지난 2월 물러난 기시 전 방위상은 2선거구를 잡고 있었다. 하야시 외무상은 3선거구다. 노부치요는 아버지의 지역구인 2선거구에 출마해 무난히 당선될 전망이다. 문제는 아베 전 총리의 사망으로 치러지는 4선거구의 보궐선거다. 당초 자민당과 지역 후원회는 아베 전 총리의 지역구에 부인 아키에 여사의 출마를 원했지만, 본인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거의 무명인 38살의 요시다 신지(吉田眞次)를 추천했다. 자민당 텃밭이라 일단 당선된다고 해도, 2년 뒤가 문제다.
야마구치현은 인구 감소 탓에 2025년 선거 때부터 선거구가 3곳으로 감소한다. 4선거구와 3선거구가 통합되면 하야시 외무상이 이번 보궐에서 당선돼봐야 기껏 초선일 요시다를 누르고 자민당 공천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야마구치현의 맹주는 이 지역 가장 큰 도시인 시모노세키를 잡은 하야시 가문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커진다. 하야시 외무상은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같은 기시다 파벌로, 차차기 총리로도 거론되는 거물이다.
일본의 한 전(前) 국회의원은 “아베 가문의 정적인 하야시 외무상의 자민당 내 세력이 강해지면 젊은 노부치요의 입지는 흔들릴 수 있다”며 “아버지 기시 전 방위상이 건강을 문제 삼아 이번 보궐선거에 맞춰 물러난 까닭은 본인이 건재할 때 지역구를 물러줘야 아들이 빨리 안착한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