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아베 신조 전 총리 피살 사건을 계기로 일본 경찰청이 총리 등 요인 경호 방식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에 나섰지만, 경호 체계가 여전히 허술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폭발물의 위력이 크지 않았던 덕분에 70대 노인과 경호원 등 2명만 가벼운 부상을 입었고 기시다 총리는 화를 면했지만, 폭발물이 총리 옆에 떨어지도록 방치한 것은 최악의 경호 실패라고 일본 언론들은 규정하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16일 “경호원들은 왜 사전에 용의자의 접근을 막지 못했는가”라고 비판했다.
먼저 경찰이 따로 지정한 공간에 있던 용의자가 총리와 10m 거리로 접근할 때까지 경찰이 손을 놓고 있었다는 점이 도마에 올랐다. 사건 당일인 15일 오전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200명에 달하는 청중이 연설을 듣기 위해 행사장에 모여 있었다. 기시다 총리가 등장한 시점은 이날 오전 11시 17분쯤. 청중은 환호성을 질렀다.
총리는 왕새우 등을 시식하고는 자민당 현지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연단 근처로 이동했다. 청중은 경찰의 안내에 따라 경찰이 지정한 사각형 공간에 모였다. 유사시 경찰들이 테러범 등을 가로막아 총리에게 다가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11시 27분에 총리가 연설을 준비하는 순간, 청중에 섞여 있던 용의자 기무라 류지가 30㎝ 크기 은색 통을 던졌다. 폭발물이 기시다 총리의 뒤쪽에 떨어지려는 찰나, 경호원이 뛰어들어 폭발물 쪽으로 보호 가방을 펼치고 발로 차는 동시에 총리를 감싸며 피신시켰다.
용의자는 가방에서 두 번째 폭발물을 꺼내려다 주변에 있던 어부와 경호원에게 제압됐다. 그 순간 투척 후 50초가 지난 폭발물이 굉음과 함께 터졌다. 청중의 소지품만 검사했어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사고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찰은 수사를 통해 기무라의 배낭에서 칼을 찾아냈다.
용의자가 가방에서 첫 번째 폭발물을 꺼내 던지는 동안,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점도 경호 체계의 허술함으로 지적된다. 청중 속에는 유사시를 대비해 사복 경찰관이 배치돼 있었다. 일본의 한 경찰 간부는 “현장 경찰관 중 왜 한 명도 용의자에게 말을 걸지 않았는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일본 경찰청은 사건이 벌어진 후에야 전국 경찰에 다른 선거 현장에서 수상한 인물을 발견하면 소지품 검사를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뒷북 조치라는 지적이 나온다.
용의자가 두 번째 폭발물을 던지려고 시도했을 때 제지한 건 경호원이 아니라, 빨간 옷을 입은 어부였다는 점도 허술한 경호 체계의 민낯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 어부가 민첩하게 용의자의 머리를 팔로 잡아 걸면서 두 번째 폭발물을 저지하는 과정에 경호원들이 합세했다. 경호원들이 오히려 일반인보다 대응이 늦었던 것이다.
아사히신문은 현직 총리의 동선이 누구나 알 수 있도록 공개된 대목도 지적했다. 사건 전날 자민당 홈페이지에 ‘기시다 후미오 총재 유세 일정 안내’가 떴다. 기시다 총리가 15일에 언제 어디에 있을지와 같은 구체적인 동선이 공개된 것이다. 사건 현장 일정도 이곳에 있었다. 효고현에 사는 용의자는 이런 공지를 보고, 승용차로 약 한 시간 반 거리인 현장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
허술한 경호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불행 중 다행으로 기무라 류지의 범행이 아베 전 총리 살해범보다 덜 주도면밀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에 사용된 폭발물은 ‘사제 파이프 폭탄’으로 추정된다. 일본 총기 전문가들은 “금속제 통의 양쪽을 막은 사제 폭탄으로, 인터넷에서 정보를 모아 시중에서 파는 화학물질로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수준”이라고 했다.
이어 “소리의 크기나 연기의 양으로 봐, 사용된 화약이 소량이며,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위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일본 경찰이 용의자의 집을 압수 수색했을 때도 별다른 추가 폭발물이 나오지 않았다.
반면 아베 전 총리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범 야마가미 데쓰야(41)는 자위대원 출신인 데다, 집에서 수차례 사제총을 제작하고 발사 시험까지 거듭하며 치밀하게 준비해 실행에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