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 날씨였던 1945년 8월 6일, 당시 다섯 살이었던 저는 친구들과 밖에 놀러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번쩍, 쿵’ 했습니다. 정신을 되찾았을 땐 어머니가 저를 꽉 껴안고 있었습니다. 유리 파편에 찔린 어머니의 치마저고리는 피로 빨갛게 물들었습니다.”
10일 재일 동포 2세인 전직 프로야구 선수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83)은 히로시마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순간을 이야기하며 여러 차례 울먹였다. 여든이 넘어서도 78년 전 기억이 생생한 듯했다. 그는 “그날 피란해서 마을의 밭에 갔는데 심한 화상에 살이 탄 사람들 천지였다. 심한 냄새를 기억한다”고 했다.
장씨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23년 동안 안타 3085개, 홈런 504개를 친 스타 선수다.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지만 한국 국적자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이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폭에서 살아남은 피폭자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7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G7(7국) 정상회의(5월 19~21일)에 맞춰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있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하기로 했다. 피폭자이자 일본에서 스스로 한국인임을 밝히고 살아온 장씨가 양국 정상의 위령비 방문에 대해 느끼는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코로나 때문에 대면이 어렵다”는 그는 전화 인터뷰에서 이 소식에 대해 묻자 “두 분께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벌써 (참배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여요. 전후 처음이죠? 나도, 내 가족도, 재일 교포들도 모두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에 갑니다. 우리(재일 교포)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들이 모두 그곳에 잠들어 있으니까. 위령비 앞에 설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선 ‘돈 벌려고 먼 타국까지 오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 모두가 인생이란 게 아닌가 합니다.”
장훈은 1940년 6월 19일 히로시마시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 출신이다. 1939년에 어머니가 형·누나 3명을 데리고 히로시마로 왔다. 돈을 벌러 온 아버지를 따라온 것이다. 이후 아버지는 귀국했다가 병사했고 가족은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정착했다.
원폭이 일으킨 3000도가 넘는 열기에 완전 파괴되거나 전소한 가옥이 히로시마에서만 5만2000채였다. 폭발지에서 직경 1.2㎞ 구역에 살던 사람은 절반이 사망했다. 백혈구 감소 등 방사능 피폭 후유증으로 그해 말까지만 히로시마 인구의 40%에 달하는 약 14만명이 세상을 떴다. 그는 “열이 몸을 태워 사람들의 얼굴과 손 모양이 바뀌었고 사람들의 살을 태운 냄새는 끔찍했다. 뜨거운 열기 탓에 많은 사람이 밭으로 오는 중간에 있는 작은 강으로 뛰어들었는데 그들은 모두 죽었다”고 했다.
그날 그의 가족도 모두 살아남지는 못했다. 장훈은 “언제나 자랑스러웠던, 피부가 하얗고 키가 큰 6학년 누나가 그날 죽었다”고 했다. “원폭이 투하됐을 때 큰누이는 수십 명과 함께 학교에서 쓰러졌고 어머니는 열기에 녹아 얼굴도 못 알아보는 아이들 틈새에서 명찰로 딸을 찾았습니다. 누이는 언제나 하얀 얼굴이어서 같이 길을 걸으면 남들이 ‘예쁘다’고 했었는데…. 그 얼굴이 짓물러 알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큰누이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장훈은 “다음 날 어머니에게 ‘누난 언제 죽었나’라고 물었더니 아무 답을 안 했다”고 했다. “새벽에 (어머니의) 통곡 소리가 났으니 아마 그때였겠지요. 지옥이라는 세계가 있다면, 그 순간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A·B·C·D등급으로 분류된 피폭자 건강수첩(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폭자에게 일본 정부가 교부하는 증명서)에 그는 A등급으로 기록돼 있다. 장훈은 “원폭 투하 지점에서 1㎞ 안에 있었다는 뜻”이라며 “대략 2~3㎞ 떨어져 살던 사람들도 거의 다 죽었지만 나는 살았다. 운명이란 게 무섭다”고 했다. 부유하지 못했던 그의 가족은 에도 시대(1603~1868년)부터 있던, 산 중턱의 후미진 부락에 살았다. 그 산이 원폭의 방사능과 열기를 막아준 것이다.
◇“진짜 무서운 건 원폭 이후의 사회”
그는 “진짜 무서운 건 원폭 이후의 사회였다”고 했다. “피폭자는 한국인이건 일본인이건,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았습니다. 원폭으로 인해 팔·다리가 없어졌거나, 화상 입은 아이들하곤 친구들이 안 놀아줬어요. 부모들이 ‘피폭도 전염병처럼 옮는다’고 생각해서였죠.” 장훈은 프로야구 선수를 은퇴하고 60살 넘을 때까지도 피폭자라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사람 타는 냄새’를 떠올리는 게 무서워, 피폭 기억이 날 것 같으면 배트를 휘둘렀다고 한다. 2000년대 중반, 일본 방송을 보다가 젊은 친구들이 ‘원폭 떨어진 지점을 구경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분노했다. 2006년 8월 15일 일본 패전일에 일본의 한 방송에 출연해 “우리 세대는 전쟁을, 그리고 원폭 체험을 후대에 남겨놔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루에 한 끼는 물로 채웠던 시절, 장훈은 큰형인 세치씨 덕분에 오사카의 고등학교에 입학해 야구 선수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야간 택시 기사로 월 3만3000엔을 벌면서 1만엔을 동생에게 매달 보냈다. 온 가족의 희망으로 오사카의 나니와상고 4번 타자로 섰다.
장훈은 “한국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다. 한 번도 한국인임을 숨긴 적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는 “중·고등학교 때만 해도 일본 사회에서 한국인들이 따돌림을 많이 당했지만 나는 야구를 해서 그랬는지 거의 차별받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인이란 감각이 오히려 없었다”고 했다.
그를 ‘한국인’이라고 자각하게 해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18살 장훈에게 프로야구 구단인 도에이 플라이어즈(현 니혼햄)가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프로야구단에 외국인 선수를 두 명까지만 허용하는 게 규정인데 도에이 구단엔 이미 미국인 2명이 있었다. 도에이의 구단주가 양자 입양을 제안했다. 일본 국적으로 ‘세탁’을 하자는 얘기였다. “어머니에게 구단주의 말을 전했더니 단호히 답하시더군요. ‘이제 됐다. 야구 그만둬라. 조국을 팔면서까지 야구 선수가 될 필요는 없다.’” 도에이는 결국 일본 야구협회에 압력을 넣어 ‘1945년 이전 일본 출생자는 예외’라는 규정을 추가한 끝에 장훈을 영입했다.
장훈은 “그날 밤 어머니가 ‘일본이 무기와 인원이 많아서 우리가 졌을 뿐이지, 같은 무기였으면 안 졌다. 우리는 앞으로 지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어머니가 ‘조선 반도’의 강한 여성이란 걸 알았다”고 했다. 아들의 전부였던 야구보다, 지긋지긋한 가난 탈출보다, 어머니에겐 조국이 소중했던 것이다. 1980년 장훈이 3000안타의 대기록을 세웠을 때 어머니 박순분 여사는 롯데의 가와사키 구장에 치마저고리를 입고 등장했다. 장훈은 “어머니는 언제나 치마저고리만 입는, 한국의 어머니”라고 했다. 그의 일본 프로야구 역대 최다 안타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았다. 일본인 스즈키 이치로 선수가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로 활동할 당시인 2009년 미·일 통산 안타 기준으로 그의 기록을 넘어섰을 따름이다.
1959년부터 23년간 프로야구 선수로 생활한 장훈이 일본의 차별을 고스란히 겪은 사건이 있다. 일본 최고의 야구팀 요미우리에서 누적 안타 2961개를 치고, 기록 달성까지 39안타를 남겨둔 시점에 롯데로 트레이드됐다. ‘일본의 자존심’인 요미우리에서 ‘한국 국적자’가 대기록을 달성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日에 사과하라, 돈 내라 언제까지 반복할 건가”
‘한국을 원망한 적 없냐’고 묻자 그는 “프로야구 선수라는 게 다들 야유도 듣곤 하지, 그걸 꼭 한국인이라서 그렇다고 탓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원망한 적이 있긴 하다”며 전혀 다른 얘기를 꺼냈다. “말하면 큰일 나니까 아무도 말 안 하지만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재일 교포니까, (한국이) 내 조국이니까 말할게요. 언제까지 일본에 ‘사과하라’, ‘돈 내라’ 반복해야 하나요? 부끄럽습니다. 그때는 센 놈이 약한 놈 먹고 사는 시대였고 우린 약해서 나라를 뺏겼죠. 절대 그렇게 당하면 안 됐는데…. 이제는 우리도 프라이드(자부심)를 갖고 일본과 대등하게 손을 잡고 이웃 나라로서 가면 안 되겠습니까.”
장훈은 “(반일 같은) 그런 소리 하는 사람들,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다”며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이웃 나라(일본)를 적으로 돌렸을 때 우리 재일 교포는 너무 괴로웠다. 그만큼 지금 한일 관계의 눈을 녹여주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윤상(윤 대통령에 대한 일본식 존칭)은 역시 멋있는 구석이 있어요. 한반도의 진짜 사나이예요.” 장훈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또한 과거사에 대해 ‘가슴 아프다’고 말했는데, ‘사과한다’는 말은 안 썼지만 (재일 교포인) 나는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장훈은 “60살까지만 해도 (원폭의) 참상을 전시한 히로시마 원폭기념관에 한 번도 못 갔다”며 “두 번 정도 기념관 입구까진 갔는데 손이 떨려서 못 들어가겠더라”고 했다. “처음 기념관 갔을 때 초등학생이 입을 만한 작은 치마를 보면서 ‘이렇게 어린 친구도 죽었다’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직원이 옆에서 ‘고등학교 3학년의 옷’이라고 했습니다. 피폭에 사람의 크기도 이렇게 작아지겠지 하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북한의 반복되는 핵 도발에 대해 그는 “내가 정치는 잘 모르지만, 전쟁은 체험해서 잘 안다”고 했다. “히로시마에서 20만명이 죽었습니다. 서로 이야기로 문제를 푸니까 인간 아닙니까. 우린 짐승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제발 전쟁만큼은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