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대 반도체 장비 업체 도쿄일렉트론은 19일 도쿄증시에서 주가 1만9900엔(약 18만원)과 시가총액 9조3854억엔(약 84조9000억원)을 기록했다. 작년 10월만 해도 1만1000엔대까지 추락했던 이 회사 주가는 8개월 만에 2배 가까이 수직 상승했다. 당초 미국 정부가 첨단 반도체 장비의 대(對)중국 수출 규제를 선언하자 일본 기업인 도쿄일렉트론도 매출의 약 30%에 달하는 중국 시장을 잃을 위기에 직면했다. 예상대로 일본 정부는 올 3월 “7월부터 첨단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을 규제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정반대 베팅을 하고 있다.

중국에 물건을 못 팔게 된 일본 반도체 장비 기업에 오히려 돈이 몰리는 이례적인 현상의 배경에는 미·중 갈등에서 부각되는 일본의 ‘지정학적 강점’과 30년 만에 찾아온 ‘수퍼 엔저’ 현상이 있다.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지정학적 강점이 부각될 것을 미리 내다본 일본 정치권과 정부가 강력하게 밀어붙인 일본 반도체 부흥 정책으로 TSMC, 마이크론, 삼성전자 같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일본에 투자하면서 이들을 상대로 장비와 소재를 공급하는 효과까지 거두게 됐다. 또 30년 만의 수퍼 엔저 현상으로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수출에서도 이득을 보고 있다. 일본 반도체 전문가는 “미국은 중국의 위협을 견제하는 최선의 카드로 일본을 택했다”며 “30년 만의 엔저도 아시아 동맹국인 일본 제조업 부활이 미국에 이득이란 판단으로 묵인한다는 해석이 나온다”고 말했다.

도쿄일렉트론뿐만 아니라, 일본 2위·3위 반도체 장비 업체인 어드밴테스트, 스크린홀딩스도 작년 10월 이후 주가가 급상승하고 있다. 어드밴테스트는 19일 주가 1만9200엔으로 작년 10월의 7000엔대와 비교하면 약 180%가 올랐다. 스크린홀딩스도 이날 주가 1만5775엔으로, 작년 10월(8000엔대)의 2배에 달했다. 일본 증시에서 일본 반도체 소재·장비 30개 종목을 모은 ‘글로벌엑스 재퍼니즈 세미컨덕터 ETF(상장지수펀드)’는 올해에만 62% 상승했다. 일본 증시의 닛케이 평균주가는 1990년 7월 이후 33년 만에 3만3000을 넘어 고공 행진하고 있는데, 반도체 종목들이 이런 활황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픽=정인성

일본 증시의 활황은 일본이 반도체 패권국인 미국의 선택을 받으면서 지정학적 요충지로서의 잠재력이 부각됐고, 이것이 반도체 주가 상승으로 현실화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수출 규제로 매출의 30%를 잃게 됐지만, 일본이 미국의 ‘반도체 대체 거점’으로 떠오르면서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투자가 쏠리자 일본 장비 업체들이 수혜를 고스란히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도쿄일렉트론은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스와 네덜란드 ASML에 이은 세계 ‘톱3′ 반도체 장비 업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일본 기업들은 대중 반도체 제재에 동참하면서 중국 수출에서 상당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지만, 그 대가로 미국의 파트너로 지정학적 이익을 향유할 수 있게 됐다”면서 “철저한 기브 앤드 테이크인 셈”이라고 말했다.

특히 경제안보 측면에서 ‘반도체 생산거점’을 자국에 확보해야 한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미국·유럽뿐 아니라 다수의 국가들이 잇따라 반도체 생산기지 유치 혹은 강화에 나서고 있다. 이는 일본 소재·장비 기업의 매출 증가로 이어진다. 최근 반도체 업황 개선에 따른 실적 회복 기대감도 일본 반도체 주에 훈풍을 불어넣었다.

30년 만의 수퍼엔저는 이런 상황을 더욱 유리하게 만들고 있다. 19일 엔화 가치는 1달러에 141엔을 기록했다. 일본 엔화는 작년 이후에 줄곧 130엔~149엔이라는 엔저를 유지하고 있다. 원화보다도 하락해 이날 한때 100엔당 897원을 기록, 8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지난 6일 대만 TSMC의 류더인 회장은 주주총회에서 “일본에 두 번째 공장 건설을 검토 중”이라며 “첫 번째처럼 구마모토에 건설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 정부가 TSMC의 투자 확대를 원하고 있고, 현재 당국과 부지 선정 관련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해외의 추가 공장 후보지로 미국이나 독일을 검토하던 TSMC가 일본의 두 번째 공장 건설을 공식화한 것이다. TSMC로선 엔저 덕분에 일본 공장 건설 비용이 예전보다 20%나 줄어들었다. 마이크론, 인텔, 삼성전자 등 해외의 다른 주요 반도체 기업들도 잇따라 ‘일본행’을 추진하고 있다. 지정학적인 리스크가 커지는 상황에서 미국만큼 안정적이면서도 훨씬 저렴한 후보지로 일본이 매력적으로 비치는 것이다. 여기에 일본은 세계 반도체 재료 시장의 50%를 차지한 곳이다. 신에쓰화학이나 아사히카세이와 같은 반도체 재료의 글로벌 기업이 즐비해 반도체 생산의 재료 수급은 물론이고 연구개발 협력에도 유리하다.

환율 전문가 사이에선 앞으로 엔저가 장기간 고착화할 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엔화 환율이 일본 반도체의 전성기였던 1980년대 후반과 비슷한 수준에서 장기간 유지된다는 이야기다. 1987년의 엔화 환율은 1달러당 120엔대였다. 도시바·NEC·미쓰비시·엘피다메모리 등 일본 반도체기업들은 1990년대 이후 30년간 이어진 90엔~110엔의 엔고를 버티지 못하고 차례로 쓰러졌다.

일본 반도체의 부활론이 비등한 가운데 일본 내에선 ‘장밋빛 전망’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일본 경제지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9일 ‘하면 된다는 정신의 위험성’이란 기명 칼럼에서 “일본의 차세대 반도체 기업인 라피더스가 대만 TSMC나 한국 삼성전자와 같은 세계 강자와 개발 경쟁에서 과연 승산이 있겠는가”라고 지적했다.

작년에 도요타자동차·NTT 등이 공동 설립한 라피더스는 미국 IBM의 기술을 이전받아, 오는 2025년 회로선폭 2나노(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 반도체 시제품을 제작하고, 2027년에 대량생산에 나설 계획이다. 필요자금은 총 5조엔이며, 일본 정부에 2조엔 규모의 자금 지원을 요청할 것으로 보인다. 니시무라 야스토시 경제산업상은 “필요한 지원을 하고 싶다”는 입장이다. 이 신문은 “만약 (라피더스가)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면 왜 민간에서 자금이 모이지 않는가”라며 " ‘하면 된다’는 일본 특유의 정신론은 더는 장애물일 뿐”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