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학살 부정의 진상

와타나베 노부유키 지음 | 이규수 옮김 | 삼인 | 288쪽 | 1만8000원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적어도 1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학살됐습니다. 일본인 민간인들이 조직한 자경단에 의해서요. 의문은 바로 그 대목이었습니다. 지진이 발생했다고 민간인들이 갑자기 같은 날부터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요?”

지난 5일 일본 도쿄에서 화상 인터뷰를 했을 때 와타나베 노부유키(渡邊延志·68) 전 아사히신문 기자는 대뜸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쓴 책 ‘관동대지진, 학살 부정의 진상’은 최근 한국어판으로 출간됐고, 본지는 18일 서울 전태일기념관의 출간 기념 간담회에서 그를 다시 한번 만났다.

2017년 8월 30일 부산에서 열린 ‘1923 관동 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희생자 유족회’ 발족식에서 유족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꽃을 바다에 던지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와타나베씨는 “조선인 학살 취재를 시작한 건, 2013년 관동대지진 90주년 때였다”고 말했다. 당시 아사히신문 문화부 기자였던 그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직후라, 관동대지진 90주년에 대한 기획전이 정말 많이 열렸는데 취재를 가보면 한편에 조그맣게 ‘조선인 학살 코너’가 있고 ‘유언비어 탓에 조선인이 죽었다’는 간단한 설명만 쓰여 있었다”고 했다. “믿을 수 없었어요. 사람이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을까요? 유언비어를 믿었다고? 한두명도 아니고, 몇천명을 죽인다고요?”

찾아봤더니 학설은 두 가지였다. 1973년과 1975년에 나온 동명의 책 ‘관동대지진’이다. 와타나베씨는 “요시무라 아키라는 1973년 낸 책에서 ‘대지진이 일으킨 집단적인 정신이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썼고, 강덕상은 동명의 다른 책에서 ‘일본 국가의 지시에 따라 자경단이 학살했다’고 썼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에게도 조선인 학살은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라고 했다. 일본 열도의 역사에서 수천명을 일방적으로 학살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와타나베씨는 집단 정신이상설이나 일본 국가의 지시로 민간인들이 조선인을 학살했다는 설도 믿기 힘들다고 봤다.

日언론인 와타나베 노부유키. /고운호 기자

“지진이 발생한 1923년 9월 1일, 신문과 전화, 교통이 모두 단절됐어요. 아사히신문이 대지진 이후 다시 신문을 발행한 게 9월 4일이에요. 학살은 요코하마에서 지진 당일인 1일 벌어집니다. 기록에는 다음 날인 2일에 요코하마의 경찰 간부가 도쿄에 ‘어떻게 대응할지’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자경단이 누구에겐가 지령을 받았다고 보기 힘든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실마리를 ‘재향군인’에서 찾았다. 여전히 대다수 일반 일본인이 ‘조선인 학살’을 믿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일본인들은 다들 ‘일본인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보통은 그렇다”며 “하지만 주저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개조된 인간, 예컨대 전직 군인들이 당시 관동에 있었다”고 말했다.

이전에 징병돼 한반도에 파견된 일본군이 이미 ‘학살’을 경험한 자들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동학농민전쟁에서 일본군은 농민 3만~5만명을 살해했다”며 “전쟁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학살”이라고 했다. 이후 1919년 3·1 운동 당시 일본 병사들은 조선인 진압에 나섰고, 만주와 연해주에서 조선인 빨치산(독립군)과 총을 겨누고 교전하는 경험을 가졌다. 징병이 끝나고 귀향한 전직 군인들은 자경단의 중심으로 편입됐고, 관동대지진 때 경찰서를 습격해 총기를 확보하고 조선인 학살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와타나베씨는 조선인을 증오하도록 부추기는 유언비어를 유포한 사람들 역시 바로 이들이었다고 본다. “당시 정말 많은 유언비어가 있었는데 우물에 독을 넣었다거나 불을 질렀다는 유언비어는 파생적인 것이었고, 유언비어의 본질은 ‘조선인이 집단 무장해서 일본인을 공격하러 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불령선인’, 즉 불평을 품고 순종하지 않는 조선인이 일본인에게 싸움을 걸어 오며 내전을 일으키려 한다는 집단적 공포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 책에서 존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2019년 발표한 논문을 반박했다. ‘위안부는 계약에 의한 매춘부였다’고 주장해 물의를 빚은 램지어 교수는 ‘관동대지진 당시 피살된 조선인이 소수였고, 자경단의 행동은 정당방위’라고 썼다.

이에 대해 와타나베씨는 “램지어의 논거는 주로 당시 일부 신문 기사였고, 그 기사들이 나오게 된 구조를 밝히며 하나하나 반박했다”고 말했다. 관동대지진 당시 도쿄와 통신은 모두 끊긴 상황이었고, 신문들은 거리의 피란민에게 들은 풍설이나 철도 통신망을 통해 얻은 정보, 군의 전문(電文) 등을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채 기사로 써서 마구 호외로 발행했다는 것이다. 유언비어가 신문 기사에 실리며 힘을 얻었다. 한마디로 가짜 뉴스가 폭발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는 “램지어 교수는 종전 일본 우익 단체의 주장을 짜깁기한 것일 뿐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당시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은 일본 정부의 태도였다. 법치국가를 표방하던 일본 정부는 공공연한 장소에서 벌어진 학살 문제를 정당화하려면 사태를 축소하고 ‘유언비어가 실재한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거짓 발표를 통해 없던 일을 있었던 것으로,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조율했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는 밤에 뜨는 별을 연결해서 그림을 그리는 별자리를 닮았다”며 “별자리는 원래 하늘에 있던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별들을 선으로 잇는 것인데 결국 아는 것만 그리는 역사도 똑같다”고 했다. 그는 “일본과 한국이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보면서 무엇을 공통으로 생각해 그리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고 했다. 와타나베씨는 “역사를 다루는 기자였고 퇴직하고 나서의 인생은 역사의 공백을 쫓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