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를 가로지르는 스미다가와(隅田川)의 교각 열 곳엔 1일 밤 녹색 불이 켜질 예정이다. 일몰 15분 뒤부터 오후 11시까지 스미다가와 다리와 도쿄도청에 동시에 켜질 녹색 등은 ‘100년 전 관동대지진을 기억하자’는 도쿄도의 공식 행사다. 녹색 불이 켜질 다리 가운데 아즈마바시(吾妻橋) 등 여섯 곳은 관동대지진의 피해를 딛고 다시 일어선 부흥 사업 계획에 따라 세워진, 이른바 ‘재해 부흥 교량’이다. 녹색은 평화·약동·번영 등을 의미하는 도쿄의 상징 색이다.
녹색 불이 켜질 시라히게바시(白鬚橋)에서 걸어서 20~30분 정도 떨어진 곳엔 아라카와(荒川) 하천이 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수많은 조선인이 이 하천에 있는 요쓰기다리 아래서 일본인 자경단에 학살당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같은 유언비어가 퍼진 탓이다. 비극의 현장에 시민 단체가 세운 높이 1m 정도의 조선인 학살 추모비는, 도쿄도 관동대지진 공식 행사에선 외면받고 있다. 이곳에선 시민 단체가 2일 학살당한 조선인의 넋을 기리는 조촐한 행사를 연다.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도와 가나가와현 등 관동(關東·간토) 일대에 규모 7.9의 대지진이 발생해 10만5000여 명이 사망·실종됐다. 일본 역사상 최악의 재해로 꼽히는 관동대지진 100주년인 올해, 일본에선 지진 희생자를 추모하고 재해 대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고 있다. 이 행사들은 ‘과거의 비극을 기억해 평화로운 미래를 준비하자’는 취지가 많은데, 당시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로 꼽히는 조선인 학살에 대한 언급은 찾기 어렵다. 일본 저널리스트 야스다 나쓰키씨는 30일 마이니치신문에 “작년에 도쿄도 인권계발센터가 주최한 전시전에서 한 교수가 조선인 학살을 언급한 영화 상영을 준비하다가 도쿄도 측의 요청으로 결국 상영이 금지됐다”며 “도쿄도가 조선인 학살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고 썼다.
도쿄도가 올해 여는 관동대지진 100년 행사는 10여 개다. ‘관광 업계를 위한 재해 대응력 향상 세미나’(6월 27일), ‘초·중등생들을 위한 토사 재해 방지 작문회’(진행 중) 등 여러 형태로 관동대지진을 기억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심각한 재해 상황에 유언비어가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 조선인 학살 사건을 되돌아보며 경각심을 갖자는 주제로 열리는 이벤트는 없다.
일본 중앙정부도 마찬가지다. 일본 내각부는 이달 17~18일 관동대지진의 진원(震源) 가까운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국립대학에서 ‘방재 추진 국민 대회’를 연다. ‘일본 최대 규모의 방재 이벤트’라고 홍보하고 있다. 이 대대적 행사에도 ‘조선인 학살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말자’는 메시지는 제외됐다.
이바라키현·도쿄대·국립과학박물관·경시청 등은 관동대지진 100주년을 기념한 전시회·토론회·캠페인을 한두 개씩 개최하고 있다. 조선인 학살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 상황은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가 여러 공식 기록의 존재에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공식 입장을 고수하면서 정부 관련 기관이 조선인 학살을 추모하거나 반추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 30일 마쓰노 히로카즈(松野博一)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정부 입장’을 묻는 말에 “정부 조사에 한정한다면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특정 민족과 국적의 사람들을 배척하는 취지의 부당한 차별적 언동·폭력·범죄는 어떠한 사회에서도 용인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교도통신은 마쓰노 장관에 대해 “반성과 교훈의 언급은 없었다”고 보도했다.
한때 정치인 등이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 추모의 뜻을 표명하곤 했지만 이런 관례는 점점 사라지는 분위기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일본 시민 단체들이 매년 주최하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 추도문을 보내지 않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고이케는 지난 2월 “(조선인 학살과 관련해) 무엇이 진실인지는, 역사학자가 풀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자신이 직접 조선인 학살을 사실로 인정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