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이지원

1962년 창립 이후 유명 남성 아이돌 가수들을 배출하며 일본 최대 연예 기획사로 군림해 온 ‘자니즈 사무소’가 창업주의 연습생 성 착취 논란으로 몰락 위기에 처했다. 일본 사회는 2019년 이미 세상을 뜬 자니즈 창업주 자니 기타가와(1931~2019)의 추악한 성범죄에 경악하는 한편,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1960년대부터 수차례 있었음에도 범죄를 단죄하지 않고 넘어가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과정에 대해 반성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래픽=이지원

자니즈는 스맙, 아라시 등 데뷔시킨 가수 상당수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일본 최고의 연예 기획사로 자리 잡았다. ‘자니즈 사건’은 그런 기타가와가 생전 남성 연습생들을 자택으로 불러 성 착취를 일삼았다는 폭로가 잇따라 터져 결국 지난 7일 사장이 사과하고 사퇴한 사건이다. 자니즈 창립 직후인 1960년대부터 기타가와의 성 학대를 고발하는 폭로가 이어졌지만 현지 주요 언론과 연예 업계는 자니즈란 업계 최고 ‘권력’을 의식해 묵인했다. 외국 언론인 BBC가 다큐멘터리로 이를 폭로하고 나서야 기획사는 성 착취를 인정했다. 자니즈 출신 남성 가수 오카모토 가우안이 지난 4월 얼굴을 드러낸 기자회견에서 “기타가와에게 15~20회가량 성적 피해를 당했다”고 밝히고, 지난달 유엔 인권위까지 기타가와의 성 착취 문제를 지적하고 나서야 이뤄진 일이었다.

지난 7일 오후 2시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기타가와의 연습생 성 착취 문제에 대한 자니즈의 첫 공식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타가와의 조카이자 자니즈 사장이었던 후지시마 주리 게이코는 기타가와의 성 가해 사실을 정식으로 인정하며 “모든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아사히그룹·기린홀딩스·일본항공 등 유명 기업들은 “자니즈 소속 연예인을 기용한 광고를 앞으로 진행하지 않겠다”고 밝혀 사실상 ‘자니즈 퇴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일본 자니즈 사무소 소속 남성 아이돌 그룹 '스마프(SMAP)'로 활동한 가수 겸 배우 기무라 다쿠야/조선일보DB

일본 사회에선 성 착취 사건에 대한 경악과 동시에 이런 일이 60년 동안 이어지도록 한 일본 사회의 문화와 시스템을 되돌아보자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피해자들의 고발이 1960년대부터 수십년째 이어져 왔음에도 주요 언론과 연예계, 시민사회 대부분이 기타가와의 만행을 묵인했다는 것이다. 1960년대 다른 연예 기획사가 1차로 폭로를 했고 1999년 일본 주간지 ‘슈칸분슌(週刊文春)’이 14차례에 걸쳐 피해자의 절절한 목소리를 담은 충격적인 기획 기사를 냈다. 하지만 기타가와에 대한 단죄는 이뤄지지 않았다.

현지 매체들은 기타가와 사건에 대한 일본 사회의 ‘암묵적 은폐’가 계속된 결과 피해자가 많으면 1000명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미국에서 ‘희대의 성 착취범’으로 사실상 무기징역을 살고 있는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피해자 수는 약 100명이었다.

일본 자니즈 사무소 소속 유명 남성 아이돌 그룹 아라시의 단체 사진/조선일보DB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자니즈는 비상장 기업으로 매출이 공개되진 않으나, 현지 매체들은 연간 1000억엔(약 9000억원) 이상 벌어들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주요 예능과 음악 방송, 광고에 자니즈 소속 연예인들이 대부분 출연하고 있어 사실상 현지 연예 업계를 독점하는 수준이다. 이에 업계 관계자들이 기타가와의 성 착취 사실을 알고도 자니즈란 거대한 문화 권력에 굴복해 이를 쉬쉬했다는 관측이 많다. 시청률이 곧 수익인 방송사 입장에선 최고 주가를 달리는 자니즈 소속 연예인들을 출연시켜야만 하는데, 자니즈에 부정적인 기사를 내보낼 경우 ‘보복성 보이콧’을 당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권력에 대항하지 않고 순응하는 일본의 ‘침묵 문화’도 기타가와의 추악한 행태가 반세기 넘도록 반복되는 바탕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아사히신문이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2017년 말 독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에 따르면, ‘일본 사회가 성폭력 목소리를 내기에 좋은 사회인가’라는 질문에 93%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한 일본 언론인은 “일본 사회에선 자니즈의 몰락이 확실해진 이제 와서야 ‘왜 우리가 그의 성 착취를 묵인했을까. 홀린 것 같다’라고 말하는 이가 많다. 자니즈가 항상, 어디에나 있었기 때문에 그 세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 듯하다”라고 했다.

일본 연예기획사 자니스 사무소가 지난 7일 기자회견을 열었던 모습. 창업주 생전 연습생 성 착취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임한 후지시마 주리 게이코(오른쪽) 전 사장과 자니스 소속 아이돌 그룹 '소년대' 출신 히가시야마 노리유키 신임 사장(왼쪽)./연합뉴스

후지시마의 뒤를 이어 자니즈 소속 3인조 아이돌 그룹 ‘소년대(少年隊)’ 출신 히가시야마 노리유키가 신임 사장에 올랐지만 그 또한 과거 기타가와의 연습생 성 학대에 가담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상태다. 성 범죄자로 결론이 난 창업자의 이름을 딴, ‘자니즈’란 회사명을 유지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서도 “성착취범 이름을 어쩌자고 계속 쓰느냐”는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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