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니’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고(故) 자니 기타가와(본명 기타가와 히로무)는 J팝의 역사로 불렸던 인물이다. 반세기 넘게 일본 대중음악계에 군림했다. 그가 1962년 창업한 ‘자니즈 사무소’는 지금도 일본 최대 연예 기획사로, 한국의 SM엔터테인먼트와 하이브 등 대형 기획사들을 합친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SM엔터가 설립 당시 자니즈 사무소를 모델로 삼았고 연습생 육성 방식을 참고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기타가와는 2~16세에 일본에서 살았고, 1947년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 고교와 대학을 마쳤다. 6·25전쟁 당시에는 미군과 함께 한국을 방문해 전쟁고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친 적도 있다고 한다. 기타가와는 1960년에 뮤지컬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보고 연예 기획사를 세우기로 결심했고, 1962년 네 명의 학생으로 그룹 ‘자니즈’를 결성했다.
그는 1970년대 가수 고 히로미에 이어 1980년대 소년대, 히카루겐지 등 보이 그룹까지 잇달아 성공시키며 독보적 입지를 세워갔다. 밴드 가수 출신 고무로 데쓰야가 1990년대 아무로 나미에, 가하라 도모미 등을 스타로 키워내 기타가와와 겨뤘지만, 고무로가 중화권 진출 등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무너지면서 기타가와의 독주 체제가 확고해졌다. 2011년 기타가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콘서트를 연출한 인물’과 ‘가장 많은 싱글 음반을 기획한 인물’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다. 2012년에는 ‘가장 많은 차트 1위 가수를 만들어낸 기획자’로도 등재됐다.
그는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려 사진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기네스북에 오를 당시 찍힌 사진이 대중에게 공개된 유일한 사진으로 꼽힐 정도다. 이는 그의 영정 사진으로 쓰였다. 2019년 7월 9일 뇌동맥류 파열로 사망한 기타가와의 장례식은 소속사 연예인만 모인 가족장 형태로 치렀다. 하지만 약 두 달 뒤인 9월 4일 도쿄돔에서 추모식 격인 ‘고별회’가 열렸다.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가 조전(弔電)을 보냈다. 일반인 추모객은 8만8000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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