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언론 매체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의 이야기를 주로 정치나 경제, 굵직한 사회 이슈에 한해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에서 교환 유학을 하고, 일본 음식을 좋아하고,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기자가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 일본에서 진짜 ‘핫’한 이야기를 전달해드립니다.
‘방구석 도쿄통신’, 지금 시작합니다.
본론부터 들어갑니다. 엔반(円盤·원반)은 사전적으론 ‘납작한 원형 물체’란 뜻이지만, 여기선 음반이나 게임이 담긴 CD·DVD·블루레이와 같은 디스크(저장매체)를 총칭합니다. 용례로는 “라이브로만 들을 수 있는 그 노래, 간절히 ‘엔반화’ 바랍니다!”가 있습니다.
아쿠스타(アクスタ)는 아크릴 스탠드의 준말입니다. 아크릴 소재로 된 판에 게임·애니메이션 등 캐릭터를 인쇄한 것으로 분리·조립하면 조형물처럼 쓸 수 있죠. 인형, 피규어보다 저렴하고 휴대하기 좋아 요새 인기입니다.
오니리피(鬼リピ)는 귀신, 도깨비 등을 뜻하는 오니(鬼)에 반복을 뜻하는 리피(リピ)를 합친 건데요. 유튜브 등에서 같은 곡이나 영상을 무한대로 반복해 재생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몇번이라도 듣고 싶은 ‘오니리피’ 노래 추천”처럼 쓰일 수 있겠네요.
초장부터 무슨 말이냐고요? 방구석 도쿄통신을 읽으시는 전국의 오타쿠(御宅) 독자들께 희소식 전달드립니다. 오타쿠에 의한, 오타쿠를 위한 ‘오타쿠 용어 사전’이 발매됐습니다. 위에 소개한 건 실제로 이번 사전에 담긴 용어들입니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특정 분야에 몰두하는 이들을 일본에선 오타쿠라 칭합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 철도, 아이돌 등이 대표적 분야로 꼽히죠. 원래 상대방의 집이나 가정을 높여 부르는 말인데, 1980년대 일본 서브컬처(하위문화) 동호회원들이 각자 좋아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서로를 오타쿠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지금처럼 뜻이 변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오타쿠 관심 분야는 각을 잡고 공부하지 않으면 대략적인 내용도 짐작할 수 없는데다, 오타쿠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오타쿠들은 엉뚱한 분야에 과하게 빠져 사는, 일종의 사회부적응자처럼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1990년대 인터넷 보급과 만화·애니메이션 산업의 발전으로 인식이 많이 나아졌다지만, 비(非)오타쿠들에게 오타쿠들이 사용하는 말은 아직 미지의 영역으로 부정적 이미지가 씌워지기 십상입니다.
이 가운데 오타쿠들에게 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를 벗겨 내고, 비오타쿠들에게도 이들이 쓰는 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오타쿠 용어 사전’이 지난달 21일 일본 전국에 출간된 것입니다. 사전을 쓴 이는 언어학자도, 문화 연구자도 아닙니다. 일본 나고야단기대학(名古屋短期大学) 현대교양학과에 다니는 여학생 12명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책을 쓴 여대생들은 제각각 다른 분야에 빠져 사는 저마다의 오타쿠들이라고 합니다. 나라(奈良) 시대의 일본어 문법을 전공한 코이데 요시코(小出祥子) 교수가 지난해 언어학을 주제로 진행한 소규모 세미나 수업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사전을 집필하게 됐다는데요.
당초 이들은 작년 11월 학교 축제에서 이벤트성으로 판매하기 위해 오타쿠 사전을 출판했는데, 학생들 사이 입소문을 타면서 초판 70부가 예약으로만 완판됐다고 합니다. 급히 70부를 증판했는데,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돼 이마저 금방 동났다고 하죠.
이후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다이지린,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등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읽어봤을 굴지의 사전들을 제작하며 교육 업계를 주름잡은 출판사 산세이도(三省堂)가 소식을 듣고 대학 측에 연락한 것입니다. 처음엔 “신(新)사전 제작에 참고하고 싶다”며 접근했는데, 차츰 대학 및 저자들과의 상의를 거쳐 “정식 출판하자”고 결론났다고 하죠.
지난해 약 반년에 걸쳐 완성된 사전은 A5(A4용지의 절반) 사이즈로 132쪽, 총 821개의 단어를 수록했습니다. 하지만 정식 출판이 결정된 이상, ‘할거면 제대로 하자’며 단어 수를 두 배쯤 늘리기로 했죠. 그렇게 최근 오타쿠 사회에서 유행하는 말을 한 명당 최소 한 분야씩, 총 14분야로 나누어 망라했습니다. 이들이 채집한 용어만 1600개에 달합니다.
‘최초의 오타쿠 사전’ 발매 소식에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예약 신청이 쏟아져 출판되기 전부터 중판(重版)이 결정됐고요. 아마존 등 전자상거래 플랫폼에서 줄곧 상위권을 차지했죠.
일본의 대표 사전 출판사 산세이도가 아마추어 대학생들이 쓴 ‘B급 감성’ 사전을 출판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렸습니다. 마이니치신문은 “일반사전 매출은 인터넷, 스마트폰 보급과 저출산으로 감소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며 “사전 업계가 새로운 수요 발굴에 나선 것”이라고 분석했죠.
사전엔 오타쿠 사회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오타쿠 공통용어’부터 게임 마니아들이 즐겨 쓰는 ‘게임 용어’, 만화·애니메이션 마니아가 사용하는 ‘2차원 공통용어’와 만화를 실사화해 인간이 연기한 콘텐츠를 일컫는 ‘2.5차원 공통용어’ 등이 담겼습니다.
이름만 들으면 어떤 용어가 적혔을지 쉽사리 예측할 수 없는 분야도 있습니다. ‘K팝 용어’와 ‘남성 아이돌 용어’, ‘BL(남성 동성애) 용어’, ‘포켓몬 용어’는 비교적 익숙한 편인데요. 용어를 아예 인기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으로 한정한 ‘아크나이츠 용어’ ‘스플래툰 용어’ ‘파이어 엠블렘 용어’ ‘프로젝트 세카이 용어’ ‘원신 용어’ 등은 비오타쿠들이 즉각 이해하기엔 버거워 보입니다.
저자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 각 용어의 ‘오타쿠적’ 의미뿐 아닌 본래 사전적 의미, 오타쿠 커뮤니티에서 쓰이는 용례, 필요시 일러스트까지 직접 그려 게재했습니다. 예컨대 ‘공급 과다’란 말은 사전적으론 ‘수요에 비해 공급이 과한 상태’지만, 오타쿠 사이에선 ‘좋아하는 게임·아이돌에 관한 새로운 정보가 계속 유입돼 숨통이 멎을 정도로 좋은 상태’라고 쓰입니다. 설명이 없다면 이해할 수 없겠죠? 그야말로 오타쿠 여대생들의 열정과 친절, 유머가 집약된 사전입니다.
교육계 일각에서는 오타쿠 용어 사전에 ‘사전’이라는 이름을 붙여선 안 된다는 반발이 일기도 했습니다. 공인 사전이 아닌데다 전문가 감수도 거치지 않았다는 거죠. 이에 대학 측은 사전이 ‘본격적인 사전’처럼 인식되지 않도록 표지와 내부 모두 ‘만화스럽게’ 디자인했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사전 공개된 용어들이 “오타쿠 사회의 암묵적인 예의범절을 무시했다” “오타쿠들이 자칫 옳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등 피드백이 잇따라 교료 전에만 수십 번의 재검토의 수정을 거쳤다고 하네요.
저자들은 변화가 빠른 오타쿠 사회 특성을 감안해 오는 2024년 사전을 재출간하겠단 계획입니다. 나고야단기대학은 현재 여대(女大)인데, “내년부턴 공학이 돼 논의의 폭이 넓어져 더 다채로운 사전 제작이 가능해진다”는 게 대학 측 설명입니다.
사전 서두에는 “오타쿠 용어는 한정된 분야에서만 쓰여서 (비오타쿠들은)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집필 배경이 적혔습니다. 비오타쿠들에게도 오타쿠가 사는 세상을 소개하고 싶다는 거죠. 의도가 맞아떨어질진 모르겠지만, 세대 간 갈등은 서로에 대한 무관심과 이해 부족에 기인한단 점에서 이 열두 여대생들의 도전은 시도만으로도 유의미할 거라 생각됩니다.
일본 주간지 프라이데이는 지난 2일 오타쿠 용어 사전이 출판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보도하면서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오타쿠들의 열정을 피부로 느끼고 싶다면 읽어보세요. 이런 책을 갖고 싶다니 ‘미친 사람’이라고요? 그건 우리에겐 칭찬입니다.”
12월 6일 열다섯 번째 ‘방구석 도쿄통신’은 일본에서 최초로 정식 출판된 ‘오타쿠 용어 사전’에 대해 소개드렸습니다. 다음 주도 일본에서 핫하고 재미 있는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13~14편 링크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기시다가 TV나와 음담패설? 日정치인들 희생양된 ‘가짜동영상’ 파문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3/11/15/AJBCTDJHIZB3XMKQQFKCWEHGIU/
한인타운 건너편, 우두커니 서있는 여성들의 정체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3/11/22/QUDMCFK3LFFN5OCO7BXM6AW5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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