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집권 여당인 자민당을 최악의 위기에 빠뜨린 ‘비자금 스캔들’의 정면 돌파에 나섰다. 비자금 의혹을 일으킨 이른바 ‘아베파(派) 리더 5인방’을 한꺼번에 내각과 당(黨)의 요직에서 경질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일본 검찰이 오는 13일 임시국회 회기 종료와 함께 본격 수사에 돌입할 예정인 가운데, 사전에 ‘환부(患部)’를 도려내는 것이다.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이지만 지난해 7월 아베 신조 전 총리 피살 이후 구심점을 잃어온 아베파가 이번 사건으로 치명타를 입을지 주목된다.

10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기시다 총리가 내각 서열 2위인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 장관을 포함해 니시무라 야스토시 경제산업상, 하기우다 고이치 당 정무조사회장(정조회장), 다카기 쓰요시 당 국회대책위원장 등 네 명을 조만간 경질한다고 보도했다. 여기에 참의원(상원)의 핵심인 세코 히로시게 간사장도 교체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일본 언론들은 “총리를 보좌하는 내각 서열 2위 자리인 관방 장관의 경질은 이례적”이라며 “전례를 찾으려면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드물다”고 보도했다. 내각제인 일본의 관방 장관은 대변인 역할과 함께 행정 부처 및 국회 원내 단체 간 조정 등을 담당하는 핵심 관직이다.

그래픽=백형선
그래픽=백형선

기시다 총리의 이번 조치는 단순히 내각·자민당 당직자를 교체한다는 의미를 뛰어넘는다. 자민당 최대 파벌인 아베파(정식 명칭 세이와정책연구회)를 정권 핵심에서 일소(一掃)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아베파는 일본 자민당 의원 380명 중 99명이 소속된 최대 파벌이지만 아베 전 총리가 지난해 7월 피살된 후 구심점을 잃은 사태다. 경질될 전망인 다섯 명은 아베파 핵심이며, 아베 피살 후 ‘5인방 집단 지도 체제’로 파벌을 이끌어왔다. 아사히신문은 “자민당 내부는 ‘아베파는 끝났다’는 충격에 휩싸였다”고 보도했다. 다른 파벌인 아소파·모테기파·기시다파는 각각 40~50명 수준이다.

최근 일본을 시끄럽게 한 자민당의 비자금 스캔들은 주로 아베파 정치인이 조사 대상이다. 아베파는 매년 정치자금 모금 행사를 열면서 각 의원에게 2만엔(약 18만원)짜리 ‘파티권(입장권)’을 50장씩 의무 판매토록 하면서, 초과 판매한 금액은 본인이 가져갈 수 있게 했다. 예컨대 200장을 팔았다면 의무 할당량 50장(100만엔)을 제외한, 150장분(300만엔)을 본인이 가져가는 것이다. 문제는 돈의 출처를 아베파와 해당 의원의 장부 어느 쪽에도 기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 검찰은 이 자금을 비자금이라고 보고, 아베파 5인방에 대해선 100만~1000만엔대의 비자금 의혹이 일고 있다. ‘정치자금 미기재’는 5년 이하의 금고, 100만엔 이하의 벌금이 내려지는 불법 행위다.

기시다 총리의 이번 판단은 ‘양날의 칼’이 될 전망이다. 지지율 20%대의 취약한 내각을 살릴 수 있는 정공법일 수도 있는 반면 아베파가 반발할 경우엔 자민당을 뒤흔들 잠재적 ‘폭탄’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니시무라 경제산업상은 10일 “수사 당국이 통장이나 장부를 요구하면 전면 협력할 것”이라면서도 진퇴와 관련해선 “직무에 대해선 책임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경질설을 일단 부인한 것이다.

급박한 정국 속에서 기시다는 9일 밤 아소 다로 부총재와 아베파 인사의 경질과 후임 인사를 논의했다고 알려졌다. 기시다는 ‘검찰의 수사 디데이’인 임시 국회 폐회일인 13일에 직접 기자회견을 열고 비자금 의혹과 향후 정권 운영을 설명할 것으로 보인다.

수사를 맡을 도쿄지검 특수부는 수사팀 구성을 마친 상태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0일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가 검사 50명을 동원한 대규모 수사팀을 꾸렸다”고 보도했다. 도쿄지검 내 검사 30여 명을 배치한 후 이것으론 부족해 주변 고검에 검사 파견을 요청해 인력을 보강했다고 한다. 수사 대상인 국회의원의 숫자가 현재 거론되는 10여 명 수준을 넘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일본엔 도쿄·오사카·나고야 세 지검에 특수부가 존재하며, 특히 도쿄지검 특수부는 정계 비리 수사에 강하다. 1976년 ‘록히드 사건’ 때는 도쿄지검 특수부가 미 방위산업체인 록히드에서 뇌물을 받은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체포하기도 했다.

일본 정치권에선 야당과 함께 연립 여당인 공명당도 자민당의 파벌 정치와 비자금을 비난하고 있다. 공명당의 니시다 마코토 의원은 이날 “정치자금을 보고서에 기재하지 않은 게 사실이라면 극히 심각한 문제”라며 “당사자인 자민당 의원들이 자진해 설명해야 한다”고 했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의 다나부 마사요 의원은 “(이번 일은) 정치 헌금을 낸 사람뿐만 아니라, 국민을 배신한 행위”라고 말했다. 국민민주당의 후나야마 야스에 의원은 “자민당의 파벌 정치는 과거에도 돈과 연관돼 문제를 일으켰다”며 “파벌을 없애는 문제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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