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언론 매체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의 이야기를 주로 정치나 경제, 굵직한 사회 이슈에 한해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에서 교환 유학을 하고, 일본 음식을 좋아하고,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기자가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 일본에서 진짜 ‘핫’한 이야기를 전달해드립니다.
‘방구석 도쿄통신’, 지금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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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8일 일본 최장수 총리를 지낸 아베 신조를 살해한 해상자위대 출신 남성 야마가미 데쓰야(山上徹也·44)를 기억하시나요? 이날 그는 나라현 나라시 야마토사이다이지역 부근에서 집권 자민당의 참의원 선거 거리 유세를 지원하던 아베 전 총리를 총으로 쏴 숨지게 했습니다. 야마가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신흥종교에 깊이 빠짐으로 인해 가족이 해체하고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며, 아베 전 총리가 해당 종교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듣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진술했죠.
당시 일본에선 전직 최장수 총리를 살해한 야마가미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는 한편, ‘종교 2세’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부상했습니다. 종교 2세란 모태 신앙처럼 종교 신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말하는데요. 일본에선 주로 신흥종교 신자의 2세를 가리킵니다. ‘종교의 자유’란 헌법 원칙 아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종교 2세들이 아베 피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등 단체 활동도 시작했죠.
최근엔 오사카 구치소에 구금돼 있는 야마가미에게 매일같이 편지가 도착하고 있다고 합니다. 7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편지의 내용들은 ‘나 역시 부모님이 신흥종교에 헌금을 쏟으면서 궁핍을 겪었다’ ‘우리 가족도 신흥종교 탓에 무너졌다’라는 등 대부분 그의 범행 동기에 공감한다는 내용입니다. 살해범에게 있어선 안 될 ‘동정론’까지 퍼지고 있는 것이죠.
야마가미는 편지에 일일이 답장하고 있진 않지만, 시간을 들여 모두 정독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지난해 10월 첫 공판 전(戰) 준비 절차를 마쳤고, 이후 공판 시기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이 가운데 일본에선 오는 22일 종교 2세들의 이야길 다룬 영화 ‘유루시(ゆるし·용서)’가 개봉합니다. 메가폰을 잡은 건 히라타 우라라(23)씨. 2020년 도쿄 릿쿄대 현대심리학부 영상신체학과 재학 시절 약 11개월간 신흥종교에 몸담았었단 그는 “‘종교 학대(부모가 자녀에게 종교 활동을 강제하는 것)’가 벌어지는 이유를 알리고 싶었다”며 영화를 만들게 된 이유를 밝혔습니다.
특히 그는 해당 종교에서 탈퇴한 직후, 내부에서 친하게 지내던 한 살 아래 동성 친구가 ‘(부모님이) 신이 아닌 나를 봐줬으면 좋겠다. 그냥 나를 사랑해주길 바랐을 뿐이다’란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받았던 충격에 제작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해당 친구는 히라타씨가 종교에서 위화감을 느끼고 거리를 두고 있을 때에도 안부 연락을 나눴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이후 히라타씨는 2021년 10월부터 소셜미디어를 통해 종교 2세들의 이야길 직접 들으러 다녔습니다. 이듬해 발생한 아베 전 총리 피살 사건으로 종교 2세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내 이야기도 들어달라’는 이들까지 생겼습니다. 현재까지 제작에 도움을 준 이는 총 3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히라타씨는 “이들이 전해준 이야기가 모두 영화 속에 녹아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영화엔 “‘악인’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고 소개했습니다. 극 중 종교 2세에 해당하는 여고생이자 주인공인 ‘스즈’뿐 아니라, 그를 신흥종교로 이끈 부모에게도 종교에 빠지게 된 저마다의 마음의 상처가 있다고 하죠. 그 원인을 만든 인물 또한 개인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 그려졌습니다. 히라타씨는 “앞으로도 ‘종교 학대’가 없어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학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의 이해를 얻는 것이 (극단적 선택을 한) 내 친구와 같은 비극을 줄일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영화 제작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도중에 주연을 맡은 배우가 두 번이나 하차했고, 후원사로부터도 ‘이대로면 그만두겠다’는 연락이 왔었다고 하죠. 히라타씨는 자신이 직접 주인공 스즈 역을 맡으면서까지 매달렸고 끝내 제작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아베 전 총리 피살 사건 이후 종교 2세를 다룬 콘텐츠가 공개되는 건 처음이 아닙니다. 일본 공영방송인 NHK도 방영에 나선 적 있는데요. 지난해 10~11월 방영된 NHK 스페셜 시리즈 ‘신의 아이가 중얼거린다(神の子はつぶやく)’입니다. 당시 NHK는 “오랜 세월 사회에서 간과돼 온 종교 2세 문제가 최근 부각되고 있다”며 “스스로를 종교 2세로 부르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사람들의 실제 경험에 근거한 2부작 드라마”라고 소개했습니다.
이 드라마의 개요는 ‘신을 믿지 않아도 엄마가 날 사랑해주길 바랐다’는 문장으로 시작하죠. 연출을 맡은 영화감독 시바타 다케시(柴田岳志)는 “특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비교적 아베 전 총리 피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2022년 10월에는 종교 2세 이야길 다룬 만화가 출간됐습니다. 작가 기쿠치 마리코(菊池眞理子·52)의 작품으로 출판사 분게이슌주(문예춘추)가 발간했죠. ‘가족과 종교-신(神)이 있는 집에서 자랐다, 종교 2세인 우리’란 제목이었습니다.
이 만화 역시 신흥종교에 빠진 부모 아래에서 지낸 자녀들의 삶을 그렸습니다. 과거 한 종교 단체로부터 항의를 받고 연재를 중단했던 작품이라 더욱 관심이 쏠렸었는데요. 아베 전 총리 사건을 계기로 종교 2세 문제가 부상하자, 독자들의 빗발친 요구로 ‘부활’했던 것이죠.
당시 자신도 종교 2세였다고 밝힌 기쿠치 작가는 “(만화가) 종교 단체에 의해 사라질 뻔했지만, 소셜미디어에 쏟아진 응원과 격려에 힘입어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일본 네티즌들은 “우리 이야길 세상에 알려 ‘악의 연쇄’를 멈춰달라”는 등 응원 메시지를 보냈죠.
일본 문학 거장 무라카미 하루키 대표작 ‘1Q84′(2009년 출간)에도 신흥종교를 믿는 부모에 의해 상처를 받았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포교 활동에 동반되는 등 피해를 보고, 성인이 되어서도 이로 인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는 내용입니다.
3월 13일 스물아홉 번째 방구석 도쿄통신은 아베 전 총리의 사망 이후 1년 반이 넘어서까지 잠잠해질 줄 모르는 일본 내 ‘종교 2세’ 문제와 이를 다룬 영화·드라마·만화 등에 대해 소개해 드렸습니다. 다음 주에도 일본에서 가장 핫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27~28편 링크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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