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살인 사건의 피해자 유족을 모욕한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린 판사를 파면(罷免)하는 판결이 나왔다. 일본에서 판사가 범죄와 같은 위법 행위가 아닌 업무 외적 표현 활동을 이유로 파면당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4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의 ‘재판관(판사) 탄핵 재판소’는 3일 오카구치 기이치(岡口基一·58) 센다이고등법원 판사를 파면하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소는 17세 여고생이 살해당한 사건과 관련한 판결에 대해 그가 2017년에 온라인에 쓴 글이 “유족에게 상처를 입혔다”며 파면 사유인 ‘심각한 비행(非行)’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이날 재판소는 “‘재판’이 그 역할을 안정적·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일반 국민의 재판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판사는 인격적으로도 일반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받기에 충분한 품위를 겸비해야 하며, 판사라는 지위에 요구되는 품위를 해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 취지를 설명했다. 표현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된다 하더라도, 재판이라는 국가의 중대 기능 중 하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판사의 ‘인격과 품위’가 필수라는 뜻이다.
일본의 판사 탄핵 재판은 범죄를 심판하는 일반 재판과 달리 ‘판사 파면 여부’라는 특수 사안을 다루는 재판이다. 일본에선 그동안 열 차례 판사 탄핵 재판이 열렸고 이 가운데 오카구치 판사를 포함해 여덟 명이 파면됐다. 과거 파면된 경우는 스토킹, 불법 촬영 등 범죄와 연루된 사건이었다. 판사가 사적인 온라인 계정에 올린 글인 데다, 범죄 행위가 아님에도 탄핵당하기는 처음이다.
오카구치 판사가 트위터(현재 X)와 페이스북에 계정을 연 때는 2008년이다. 계정에 판사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실명과 본인 사진을 썼다. 글을 하루에 10~15건씩, 총 4만건 올릴 정도로 소셜미디어에 열성적이었다. 팔로어가 늘자 알몸이나 속옷 차림 사진을 올려 2016년 도쿄고등법원의 ‘엄중 경고’ 처분을 받기도 했다.
파면 사유가 된, 여고생 살인 사건에 관한 문제의 글을 올리자 피해자 유족은 오카구치 판사에게 항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게시물을 내리기는커녕 트위터에 “판결문을 게재한 건 (내가 아니라) 도쿄고법”이라고 다시 올리는 식으로 반복해서 관련 글을 게시했다. 참다못한 유족은 오카구치 판사의 게시 글 열세 건을 근거로 판사 소추(탄핵 재판 회부)를 신청했고 2022년 3월부터 재판이 진행됐다. 재판소는 이 중 일곱 건이 파면 사유에 해당하는 ‘심각한 비행’이라고 판단했다. 판결문은 “오카구치 판사가 유족에게 상처를 주려는 의도를 갖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상처를 줬고, 일반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받을 만한 품위 있는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며 “유족의 항의를 받고도 반성이나 개선 없이 비슷한 행위를 반복한 것은 판사에게 허용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 한계를 벗어났다”고 전했다.
이날 재판소는 오카구치 판사가 유기견의 소유권 관련 소송에 대해 “어? 당신? 이 개를 버렸잖아? 3개월이나 버려둬 놓곤”이라고 올린 2018년 사건도 논의했다. 판사가 민사소송의 한쪽 당사자를 일방적으로 비난한 것이 문제가 됐다. 이에 대해 재판소는 “품위를 손상한 ‘비행’임은 부정할 수 없다”면서도 “살인 사건 게시물에 비해 악의성이 낮다”며 ‘심각한’ 비행까지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날 파면 판결에 대해 오카구치 판사 측 변호사들은 “증거를 바탕으로 평가·판단한 재판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아사히신문은 “파면은 판사에겐 사형 판결과 같다”며 “잘못에 비해 지나친 판결”이라고 보도했다.
☞일본의 재판관 탄핵 재판소
비행(非行)으로 물의를 일으킨 재판관(판사)의 파면 여부를 결정하는 기관이다. 범죄 피의자의 유죄 여부나 처벌 수위를 따지는 형사 재판과 달리 ‘재판관의 파면 여부’만 본다. 일반 국민이나 최고재판소(대법원)가 비행을 저지른 판사에 대한 탄핵 소추를 신청할 수 있다. 이후 재판관 소추 위원회가 재판이 필요하다고 결정하면, 중의원(하원) 7명, 참의원(상원) 7명 등 14명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재판관 탄핵 재판소가 꾸려진다. 재판에서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판사는 파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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