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일본 도쿄의 한 외환 시세판 모니터에 엔·달러 환율이 표시되고 있다. 이날 엔화 가치는 달러당 160엔까지 떨어지면서 1990년 4월 이후 34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AP연합뉴스

일본의 화폐 ‘엔(円)’ 가치가 29일 한때 달러당 160엔까지 추락했다. 요미우리신문, 니혼게이자이신문,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NHK 등 일본 언론들은 “엔 가치, 34년만에 최저 기록”이라며 일제히 속보를 전했다. 일본 여론은 당초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이 환율 개입을 해서라도 ‘달러당 155엔’을 방어선으로 삼아, 엔저를 막을 것으로 봤지만, 160엔까지 돌파당한 것이다.

29일 일본 엔은 오전 한때 달러당 160엔으로 밀렸다가 오후에는 155엔으로 반등했다. 3~4시간 만에 엔이 5엔 안팎이나 급등락한 것이다. 글로벌 주요 통화 중 하나인 엔화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엔은 유럽의 유로에도 약세다. 이날 한때 엔은 유료당 171엔을 찍어, 유로가 도입된 1999년 이래로 최저치를 기록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이 공휴일이라, 도쿄외환시장이 열리지 않은 가운데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와 같은 일부 아시아 시장에서 환율 거래가 진행되면서, 거래량이 적은 게 일본 엔이 급등락하는 한 요인”이라고 보도했다. 일본에서 4월 29일은 쇼와천황의 생일을 기리는 ‘쇼와의 날’(공휴일)이다.

엔 급락에 불을 붙인건, 다름아닌 일본은행이다. 일본은행은 지난 26일 기준 금리 동결을 발표했는데 이후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우에다 가즈오 총재가 당분간 추가로 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을 부인한데다 엔저를 용인하는 듯한 발언까지 한 것이다. 우에다 총재는 “일본은행의 금융정책은 (엔·달러) 환율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며 “엔저가 장기화되면, 임금 인상으로 이어지고, 물가 기조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기자회견서 ‘엔저의 영향은 (금리 인상 판단에) 무시할만한 수준인가’라는 질문에 우에다 총재는 “그렇다”고 단언했다.

우에다 총재의 발언은 외환 시장에 ‘일본 당국이 달러당 155엔에 환율 개입하지 않을 것’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기자 회견 이후에 장을 연 뉴욕외환시장에서 26일(일본 시간은 27일) 엔은 158엔으로 급락했고, 주말이 지난 29일에는 160엔까지 밀린 것이다.

엔의 가치는 오는 30일에서 다음달 1일까지 열리는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발언에 따라 크게 요동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현재의 엔저 추세는 일본과 미국간 기준 금리 차이에 따른 것이다. 일본은행이 당분간 0~0.1%인 기준 금리를 올리지 않는다면, 미국이 5.5%인 기준금리를 내려야, 격차가 좁혀진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 26일 발표된 미국 개인소비지출(PCE)가 예상보다 높았던 데다, 미국 국내총생산(GDP)도 견조해, 미국 연방준비이사회(FRB)가 기준 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은 낮은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엔을 지키는 마지막 수단은 여전히 일본 당국의 환율 개입이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외환 시장에선 일본 당국과 일본은행의 환율 개입에 대한 경계감이 높다”고 보도했다. 일본 당국이 160엔이란 엔저는 용인하지 않을 것이란 추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