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오모리 현립 미술관에 들어서자 높이 9m에 너비 15m 대형 그림 4점이 앞뒤와 좌우를 에워쌌다.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마르크 샤갈(1887~1985)이 그린 ‘알레코’다. 엄청나게 큰 이유는 이 그림들이 발레를 공연할 때 필요한 무대 배경화이기 때문이다. 샤갈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뉴욕의 발레단에서 의뢰받아 배경 그림을 4점 그렸다. 전시관의 이름도 ‘알레코홀’이다.
발레 공연 순서에 따라 제1막 ‘달빛 아래의 알레코와 젬피나’, 제2막 ‘카니발’, 제3막 ‘어느 여름날 오후의 밀밭’, 제4막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환상’의 배경화로 쓰인 걸개그림이다. 제3막의 그림에서 2개의 붉은 태양과 황금빛 밀밭의 색채에는 발레나 그림을 잘 모르는 일반인도 순식간에 매료된다. ‘이래서 샤갈을 색채의 마술사라 하는구나’를 납득했다. 1, 2, 4막은 아오모리 현립 미술관 소유이고 3막은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장기 대여·전시하고 있다. 홀 중간 의자에 앉아 순서대로 찬찬히 보면 공연 한 편을 감상한 느낌이다.
아오모리 현립 미술관 관계자는 “알레코홀에선 1년에 한두 번씩 발레 공연이나 음악회를 연다”며 “올해도 가을·겨울쯤 예정하고 있는데, 다른 곳에선 좀처럼 맛보기 어려운 경험”이라고 말했다. 2006년 개관한 아오모리 현립 미술관은 설계할 때부터 알레코 그림의 전시를 염두에 뒀다. 5층 높이 층고를 가진 알레코홀에서 연주하면 다른 어디에서도 느끼기 어려운 울림을 준다는 것이다. 샤갈의 그림도 본래 목적대로 음악이나 발레의 배경화로 쓰이는 것이다.
‘푸른 숲’이란 의미인 아오모리(靑森)현은 대표적인 힐링 관광지다. 일본 열도의 가장 큰 섬인 혼슈(本州)의 북쪽 끝에 있는 아오모리현은 동쪽으로 태평양, 서쪽으로 동해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쓰가루해협을 사이에 두고 홋카이도와 마주하고 있다. 면적은 9644㎢로 경상남도(1만542㎢)와 비슷하고 인구는 117만명에 불과하다. 아오모리현에는 ‘인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너도밤나무 원시림’으로 유명한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인 시라카미 산지(山地)는 물론이고 도와다호수·핫코다산(山)·이와키산·호토케가우라와 같은 자연 경관이 넘쳐난다. 하지만 아오모리 대자연 뒤에 숨겨진 매력은 아오모리 현립 미술관, 히로사키 현대미술관, 도와다시 현대미술관, 하치노헤 미술관 등 개성 넘치는 젊은 현대미술관들이다.
◇일본인이 사랑한 목판화가 무나카타
큰 머리에 큰 눈을 가진 여자아이에게서 묻어나는 섬뜩한 표정. 일반인들도 누구나 ‘맞다, 이런 그림 본 적 있다’고 할 요시토모 나라(美智奈良·1959~)의 그림은 아오모리 현립 미술관에 약 170점이 있다. 너무 많아 20~30점씩 돌아가면서 전시할 정도다. 2019년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요시토모의 작품 ‘등 뒤에 품은 칼’은 1억9570만 홍콩달러(약 340억원)에 낙찰돼, 아시아 생존 작가 중 최고가를 기록했다.
애수(哀愁)의 표정을 짓는 귀여운 개도 요시토모의 특징적인 작품이다. 아오모리 현립 미술관 야외에는 높이 약 8.5m ‘아오모리의 개’가 있다. 사각형의 닫힌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거대 조형물이다. 적설량이 많은 아오모리현에서 눈이 오면 ‘아오모리의 개’도 눈 속에 잠긴다. 많을 땐 1m 이상 파묻히기도 한다. 일본에서 연간 적설량(7m82㎝, 2015년 기준)이 가장 많은 아오모리의 특징을 살린 작품이다. 아오모리는 삿포로(4m85㎝)보다 눈이 훨씬 많이 내리는 ‘설국(雪國)’이다.
순백의 건물인 아오모리 현립 미술관에선 일본을 대표하는 목판화가 무나카타 시코(棟方志功, 1903~1975)의 세계관도 볼 수 있다. 미술관은 아오모리 출신인 그를 기려, 무나카타시코 전시실을 만들고 연 4회 전시품을 교체해 전시하고 있다. ‘나는 기필코 고흐가 될 것이다’라며 고흐를 흠모한 무나카타는 이전의 목판화와는 전혀 다른 화풍을 보여준다. ‘하나야노사쿠(꽃화살)’와 같은 대표작보다 가슴을 드러낸 에로틱한 목판화가 그의 개성을 전해줄 것이다.
조각가·화가는 아니지만 일본에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나리타 도루(成田亨, 1929~2002)’의 작품도 전시되고 있다. 나리타는 ‘울트라맨’ 시리즈의 괴수와 히어로를 디자인한 인물이다. 펜으로 그린 수채화인 ‘울트라세븐 결정원고 B안’(39.4x35.0㎝)이나 ‘지부루 성인’(36.4x36.1㎝), ‘가네곤 결정원고’(34.2x22.2㎝)를 볼 수 있다. 나리타는 효고현 고베시에서 태어났지만, 출생 직후 아오모리시로 이주했다. 부모도 모두 아오모리현 출신이다. 안타깝게도 방문했을 땐 잠시 울트라맨 전시를 중단한 시기였다.
◇요시토모 나라의 고향에서 보는 ‘애수의 개’
아오모리현에서 가장 젊은 미술관은 2020년 문을 연 히로사키 현대미술관이다. 한국어 팸플릿에는 ‘히로사키 현대미술관’이지만, 일본어로는 ‘히로사키 벽돌창고 미술관’이다. 미술관은 벽돌 건물 2동으로 이뤄졌는데, 각각 1907년과 1923년에 건축된 근대 산업 유산이다. 한국을 비롯해 대부분 아시아 국가는 근대화의 첫발도 못 뗀 1907년, 이 지역의 실업가 후쿠시마 도스케는 주조장의 벽돌 창고를 건설했다. 당시 비쌌던 벽돌로 건물을 지으며 후쿠시마는 “만약 사업에 실패해도 이 건물들은 나중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고 말했다. 벽돌 창고에선 1954년 일본 최초로 시드르(사과 발포주)를 제조했고, 닛카 위스키 공장으로도 사용됐다.
미술관이 된 건, 요시토모 나라가 계기였다. 12년간 독일 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마흔한 살의 요시토모는 고향인 히로사키의 벽돌 창고에서 2002년, 2005년, 2006년에 전람회를 열었다. 고향의 시민들이 자원봉사자로 대거 참여한 전람회였고 일본 전역에서 15만명 이상이 찾아왔다. 요시토모는 2007년 자원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A to Z 메모리얼 개’라는 작품을 제작·기부했다. 히로사키시(市)는 이후 100년 된 건물을 인수해 ‘기억의 계승’이란 콘셉트로 벽돌벽을 흠집 없이 보존했다. 미술관 지붕은 티타늄으로 덮었다. 지붕은 빛의 각도와 양에 따라 밝은 금색에서 은빛으로, 때론 푸른색으로 변한다. 야외에 설치됐던 ‘메모리얼 개’는 미술관 내부로 들어왔다.
히로사키 출신인 아오모리현 관계자는 “‘밖에 있으면 추우니 안에 넣어주자’는 시민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라며 “요시토모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 친척은 그를 ‘항상 게타(일본 나막신) 신고 다니던 사람’이라고 기억한다”고 했다. 히로사키 시민들에게 요시토모는 친근한 동향 사람이란 것이다.
◇도시 전체가 미술관인 도와다市
인구 6만의 도시인 아오모리현 도와다시의 도로를 달리다, 창 밖으로 집채만 한 호박 조형물이 보여 차를 멈췄다. 흔한 동네 공원 같은 공간에 노란색 바탕에 온통 검은 점이 찍힌 호박 조형물이 떡하니 설치됐다. 공원 바닥은 녹색 바탕에 노란색 점박이다. 소녀와 강아지 조형물도 있었다. 역시 핑크색 바탕에 하얀색 점들이 찍혔다. 점박이 버섯 조형물도 이곳저곳에서 보인다. 공원에 들어서는데, 일본 초등학생 서너명이 일본식 책가방인 란도셀을 메곤 그들에겐 ‘흔한 조형물’인 호박에는 눈길도 안 준 채 잡담하며 지나갔다.
입장권도 필요없는 동네 공원의 조형물은 구사마 야요이(草間彌生·1929~)의 작품 ‘러브 포에버, 싱잉 인 도와다(Love Forever, Singing in Towada)’였다. 설치미술가인 구사마 야요이는 살아 있는 현대미술의 거장이다. 어린 시절부터 환각과 환청에 시달렸고 중년에는 정신병원에서 생활했고 온 세상을 알록달록한 ‘땡땡이’로만 본 인물이다. 구사마의 호박 조형물 주변에는 오스트리아 작가인 에르빈 부름의 ‘살찐 집과 살찐 자동차’, 독일 출신 작가 3명이 결성한 공공미술 그룹인 잉어스 이데(inges Idee)의 ‘유령과 미확인 물체’ 조형물이 설치됐다.
도와다시는 ‘도시 전체를 미술관으로 만들자’는 ‘아트 도와다 프로젝트’로 도시 곳곳에 미술 작품을 설치했다. 2008년 설립된 도와다시 현대미술관(十和田市現代美術館)은 프로젝트의 중심이다. 도와다시 현대미술관에는 ‘비틀스’ 존 레넌의 아내인 오노 요코의 ‘평화의 종’이 있다. 종을 치고 옆의 자갈길을 건너, 맞은편 나무에 소원을 적은 쪽지를 적는 콘셉트. 인간의 소망을 담은 작품이다.
호주 출신 작가 론 뮤익의 ‘서있는 여성’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예술성 여부는 모르겠지만, 인간과 너무도 똑같은 4m의 거인 여성 모습에 압도됐다. 노부인의 처진 피부와 주름은 물론이고 속이 비칠 듯한 혈관과 흰색 머리카락을 마주하니, 비현실적인 거인 여성의 늙음이 너무 슬퍼 보였다.
아르헨티나 출신인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조형물인 ‘건축물–부에노스아이레스’는 재밌는 작품이다. 일본인 10대 청소년 서너명이 작품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으면서 놀고 있었다. 평면 바닥에다 건물 외벽의 그림을 그려놓고 밑에 비스듬한 거울을 설치해, 작품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건물 외벽에 매달린 것과 같은 모습이 연출된다. 중력을 거스르는 ‘인생샷’을 찍을 수 있다.
한국인 조각가인 최정화의 ‘꽃말(Flower Horse)’과 서도호의 ‘인과(Cause and Effect)’도 전시됐다. 미술관 입구에 설치된 꽃말은 피부가 화려한 꽃으로 이뤄진 말이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듯한 꽃말은 미술관을 찾는 관광객에게 주는 ‘꽃다발’처럼 다가왔다. 인과는 거대한 샹들리에인데, 자세히 보면 유리 장식이 아니라 무수한 인간 모형들로 이뤄졌다. 인간 모형들은 서로 목마를 태워, 샹들리에처럼 천장으로 이어진다. 마치 과거의 기억이 인간과 인간을 이어가며 전해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