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광산에서 2km 정도 떨어진 아이카와 향토 박물관에는 ‘조선 반도(한반도를 지칭하는 일본식 표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 노동자의 생활’이라는 전시관이 생겼다. 이 박물관 건물은 본래 일본 메이지 시대 때는 일본 천황의 재정을 관리하는 궁내성 어료국(御料局)이었다. 1996년 일본 문화재청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한 곳이다.
건물 2층의 가로 5.2m, 세로 4.2m 크기 전시실에서는 ‘일본 정부가 한국인 노동자를 강제 징용했다’는 표현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강제 징용이 있었음을 표현한 내용은 일부 전시됐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한 국민징용령에 따라, 조선 반도에 징용이 도입돼 1945년까지 사도광산에 1000명 이상의 한국인 노동자가 있었다. (한국인 노동자의) 모집은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얻은 뒤, 민간 기업이 노동자를 채용하는 구조였다”는 설명이다.
사도광산의 한국인 노동자 수와 관련해선 1519명이란 기록이 전시됐다. 19세기 말 사도광산 노동자가 1885명이란 문헌 기록이 있는 만큼 상당수가 한국인이란 얘기다. ‘귀국 조선인에 대한 미불 임금 채무 등에 관한 조사에 대하여’라는 자료는 당시 한국인 노동자가 받은 부당한 처우를 기록한 문서다. 사도광산 측이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채권자(한국인 노동자) 1140명에 대한 미지불 임금(총 23만1059엔59전)을 공탁한 기록이다.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삭암·지주·운반 같은 위험한 경도 작업에 많이 투입됐다는 내용도 있다. 일본인은 146명인데 반해 한국인은 373명이 투입됐다는 것이다. 삭암은 화약을 설치하기 위해 암석을 뚫는 일이며, 지주는 붕괴 위험이 높은 갱도에다 나무로 버팀목을 만드는 일이다. 가혹한 노동 환경에 못 견딘 한국인 노동자들이 1940년 2월 노동쟁의를 일으킨 사실이나 1941년 12월에 작업 도중 한국인 노동자가 사망한 일도 전시됐다.
노동의 강제성을 시사하는 ‘반도 노무 관리에 대하여’라는 자료도 전시됐다. 계약이 만료된 한국인을 ‘여하를 막론하고 전원 계속해서 취로(就勞)토록 한다’는 내용이다. 자유의사로 귀국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문서엔 ‘1940년 7월 한국인 노동자의 평균 근로 일수가 28일’이란 내용도 있다. 연초지급대장이란 문서에는 한국인 노동자 7명이 도주했고 3명은 형무소에 수감됐다는 기록이 있다.
‘강제 동원’에 대한 직접적인 사과 표현은 없었다. 다만 “당시 혹독한 환경에서 많은 분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것에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발언(2023년 5월 한일 정상회담) 발췌가 전시실 한편에 있을 뿐이다.
일본의 조선인 노동자 강제 동원 관련 전시 공간에 ‘강제성’ 표현이 담기지 않았다는 논란을 두고 국내 학계에선 평가가 엇갈렸다. 사도광산 문제를 가장 오래 연구해 온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는 “2015년 군함도 등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때보다는 구체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진전이 있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라며 “일본 측이 전시에서 강제성을 인정했다고 볼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충분하지 않거나 모호하다고 판단하는 부분은 앞으로 계속 의견을 제시해 정부가 대응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조건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조선인이 힘들게 노동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지만, 강제 동원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징용의 강제성에 대해 일본 측은 일제 말인 1944년 9월에서야 조선인에게도 국민징용령을 시행한다는 조치가 내려졌고, 그 전의 조선인 노동력 동원은 강제 동원이라 할 수 없다는 시각을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국내 학계는 대체로 일제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한 이후 1944년 9월 이전에도 조선인 강제 동원이 이뤄졌다고 본다. 1938년 이후 기업을 통한 모집, 관(官)의 알선 등을 통한 사실상의 강제 동원이 존재했고,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노무동원계획(1939~1941)과 국민동원계획(1942~1945) 등 조선인 노동력을 동원하려는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조건 교수는 “조선인 입장에서는 징용을 거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며 “조선인의 반발과 반대급부로 얻을 수 있는 권리를 차단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직접 개입하지 않는 것처럼 기업 등에 떠넘긴 것”이라고 말했다. 정혜경 대표는 “1938년과 1944년 일제의 조치는 똑같은 것으로, 모집 역시 강제 동원의 한 형태였다”고 말했다.
지목된 사람이 동원에 응하지 않으면 면사무소 직원 등에 의해 끌려가 폭행을 당하거나 배급이 끊기는 불이익을 당했고, 도망갈 경우 가족에게 피해가 가는 경우도 많았다. 뒷받침되는 규정이나 제도가 거의 없어 오히려 1944년 이전의 징용은 ‘최소한의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하는 수준의 강제 동원’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강제 동원의 규모는 국내외를 통틀어 연인원 780만명, 해외로 동원된 인력은 1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