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67) 일본 총리가 다음 달 말쯤 치러지는 집권 자민당의 총재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자민당 신임 총재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주고 본인은 퇴임하겠다는 것이다. 내각제인 일본에선 다수당 대표가 총리가 된다. 현재 제1당은 자민당이다.

지난해 말 자민당에서 소속 의원들의 정치 자금 스캔들이 불거진 후 기시다 내각은 지지율이 10~20%대에 머물러 왔다. 최악의 지지율이 반등하지 않으면서 기시다는 당 안팎으로부터 퇴진 압박을 받아왔다. 이에 기시다는 결국 총리 연임을 포기하고 물러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기시다는 14일 오전 총리 관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다음 달 총재 선거에 불출마하겠다고 밝히면서 총리 연임 포기를 공식화했다. 기시다 총리는 이날 “자민당이 바뀐 모습을 국민에게 확실하게 보일 필요가 있고, 그 첫걸음은 내가 물러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차기 자민당 총재 선거엔 고노 다로 디지털상,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담당상, 모테기 도시미쓰 간사장,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 등이 출마할 것으로 전망된다. 기시다는 2021년 9월 말 3년 임기(연임 가능)의 자민당 총재에 첫 당선됐고, 10월 4일 총리에 취임했다. 전임 아베 신조 총리가 재선을 거듭하며 8년 이상 총리를 지낸 것과 달리 3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래픽=백형선

기시다 퇴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자민당 정치 자금 스캔들은 주로 당내 아베파(派, 정식 명칭 ‘세이와정책연구회’) 정치인들이 일으킨 것이다. 아베파는 매년 정치 자금 모금 행사를 열면서 각 의원에게 ‘입장권(파티권)’을 팔도록 했고, 초과 판매한 금액은 본인에게 돌려줬다. 의무 할당량을 넘긴 판매 금액은 본인이 가져가도록 했는데, 이 돈이 어느 장부에도 기록되지 않으면서 비자금이란 비판을 받아왔다. 일본에서 ‘정치 자금 미기재’는 5년 이하의 금고, 100만엔 이하의 벌금이 내려지는 불법행위다.

해당 스캔들로 여론이 급속히 나빠지자, 기시다 총리는 ‘파벌 정치 해소’를 내걸었다. 올해 초 위기 돌파를 위해 자신의 파벌인 기시다파의 해산을 밝혔다. 등 떠밀린 아베파·니카이파 등 다른 파벌들도 연이어 해산했다. 이런 ‘승부수’에도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은 정권 퇴진 위기 수준인 10~20%대에 머물렀다. 요미우리신문은 “기시다 내각이 낮은 지지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자, 당내 의원들 사이에선 기시다 책임론과 함께 ‘간판 얼굴’(총리)을 바꾸지 않으면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대로 경쟁할 수 없다는 여론이 거세졌다”고 했다.

자민당 후임 총재에 누가 오를지 가늠하기는 아직 이르다. 현재 총재인 기시다가 불출마를 공식 표명하면서 당내 경쟁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자민당에서 총재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한 후보는 아직은 없다.

당장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만 봤을 때는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이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당내 입지가 약해 최종 선출은 쉽지 않다는 전망이 많다. ‘차기 총재로 적합한 인물’을 묻는 요미우리신문 여론조사에선 이시바 전 간사장과 고이즈미 전 환경상이 각각 25%와 15%의 지지를 얻어 1·2위였다. 고노 디지털상(8%)과 다카이치 경제안보담당상(6%)이 뒤를 이었다.

TV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이시바는 솔직한 언변으로 일반인에게 인기가 높지만, 일본 정치권에선 “총재 당선 가능성은 낮다”고 평가된다. 자민당 총재 선거는 주요 파벌이 쥐락펴락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당 소속 국회의원과 당원의 표를 더한 1차 투표에서 과반이 안 나오면, 1·2위 후보가 결선 투표로 맞붙는데 이때는 국회의원과 도도부현(우리나라의 광역자치단체) 47곳만 투표권을 갖는다. 파벌 간 전략적 합종연횡이 이뤄지기 마련인데, 이시바는 특정 파벌의 지원을 못 받고 있어 과반을 가져갈 가능성이 희박하다.

실제로 3년 전 치러진 총재 선거에선 기시다 총리가 본인이 이끄는 기시다파(의원 수 40명대)와 아소파(50명대)·모테기파(50명대)의 3자 연합으로 승리했다. 당시 고노 다로 디지털상은 당원 지지에선 1위였지만 국회의원 표를 못얻어 ‘기시다 연합’에 고배를 마셨다.

고노 다로 디지털상도 3년 전 패배를 딛고 다시 선거에 뛰어들 전망이다. 자신이 속한 ‘아소파’의 수장인 아소 다로 자민당 부총재에게 출마 의사를 전했다고 알려졌다. 고노 디지털상의 아버지인 고노 요헤이는 1993년 관방장관으로 있을 당시 일본 정부로선 처음으로 일본군의 위안부 관여를 인정하는 ‘고노 담화’를 발표한 인물이다. 3년 전 같은 파벌 의원인 고노를 지원하지 않고 기시다를 밀어줬던 아소 부총재가 이번엔 누구를 선택할지도 ‘관전 포인트’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아들인 고이즈미 전 환경상이 총재 선거에 나설지도 주목된다. 43세인 고이즈미는 젊은 이미지를 앞세워 대중적인 인지도를 확보한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일본 정치권에선 “언젠간 꼭 한번 총리를 할 인물”이라는 평이 많다. 부친인 고이즈미 전 총리가 ‘50세 전에는 총재 선거에 나오지 말라’고 조언했다는 얘기도 있긴 하다. 지지 기반이 약한 40대 총리는 단명하기 쉽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그는 주변에 “(출마 여부는)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말했다고 알려져 출마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는 평가다.

다카이치 경제안보담당상은 자민당 내 극우 성향 의원들의 지지를 모아, 총재 선거에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다카이치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매년 참배하는 인물로, 3년 전 선거 당시엔 아베의 지원을 받았다. 아사히신문은 “아베 전 총리의 후광이 없는 상황이라 현재는 보수 성향 의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못 얻고 있다”고 했다. 자민당 의원들 사이에서나 국민 여론조사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진 못하고 있지만, 모테기 도시미쓰 간사장이나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 같은 인물이 출마할 가능성도 있다.

일본 정치권에선 “주요 파벌끼리의 연합, 후보 간 지지 선언이 다음 달 총재 선거의 당락을 가를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아소파를 제외한 나머지 파벌은 공식적으론 모두 해산됐지만 여전히 결속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결선 투표를 치른다면, 자민당 국회의원 372명과 광역단체 47표 중 절반의 지지가 필요하다. 과거 파벌 기준으로 소속 의원 수는 아베파가 약 100명, 아소파·모테기파·기시다파·니카이파가 각각 40~60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