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교토국제고 교장에서 퇴임하면서 ‘5~10년 안에 야구부가 일본 정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빨리 결승 기회를 얻어낼 줄은 몰랐습니다.”
박경수(65) 교토국제고 전 교장은 지난 21일 일본 효고현 고시엔(甲子園) 구장에서 열린 재일 한국계 교토국제고와 아오모리야마다고의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준결승전을 한국 세종시에 있는 집에서 인터넷 중계로 봤다. 3대2 아슬아슬한 승부가 이어지던 9회 말, 아오모리야마다고 타자가 친 땅볼을 교토국제고 수비진이 잡아 세 번째 아웃카운트를 올리자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했다고 한다. 박 전 교장은 22일 본지 통화에서 “끝까지 집중력을 지켜 승리한 선수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며 웃었다.
교육부 공무원 출신인 박 전 교장은 정년을 앞둔 2017년 재일 한국계 학교인 교토국제고 교장에 취임했다. 과거 주(駐)오사카 총영사관 근무 때 교토국제고 이사회 등 관계자들을 만났던 인연을 계기로 맡은 일이었다. 그는 부임 직후부터 ‘야구부가 살아야 학교가 살아난다’며, 야구부 숙소 화장실·목욕탕부터 벽지 하나까지 새 걸로 교체했다. 빠듯한 학교 예산을 쪼개서 배트·글러브 등 훈련 장비도 넉넉히 마련해줬다. 당시 학생 수가 70명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 적어서, 일본에서 인기인 고교 야구를 잘하면 학생 모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내린 결정이었다고 한다. 1999년 만들어진 교토국제고 야구부는 결국 2021년 사상 첫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일명 ‘여름 고시엔’) 입성 및 4강 진출이란 ‘기적’을 썼고, 올해는 처음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박 전 교장 임기는 원래 내년까지였지만 2022년 봄 무렵 건강이 악화해 은퇴 시기를 1년 앞당겼다. 올 4월 귀국하고서 한국에서 건강 회복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이날 ‘교토국제고 야구부 신화’의 공(功)을 2008년부터 함께한 고마키 노리츠구(41) 감독에게 돌렸다.
21일 준결승 때 교토국제고는 1회에 내준 점수(2점)를 5회까지 만회하지 못하다 6회 공격에서 3점을 내리 따내 경기를 뒤집었다. 여름 고시엔 선수들은 온열 질환 방지를 위해 5회를 마치고 10분간 휴식하는데, 박 전 교장은 이때 고마키 감독의 ‘특훈’이 있었을 것으로 봤다. “(경기가 끝나고) 들어보니 고마키 감독이 ‘당황하지 말고 마음껏 놀아라. 기회는 반드시 또 온다’며 선수들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더라고요. 그 덕에 선수들이 곧장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역전에 성공한 거죠. 평소에도 고마키 감독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선수들 신망을 받아 왔습니다.” 박 전 교장은 이어 “고마키 감독은 2008년 스물넷의 나이로 감독에 부임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잠깐만 일하고 그만두려고 했었다고 들었다”며 “하지만 한국서 유학을 온 신성현(지난해 두산베어스에서 은퇴) 선수의 끈기와 ‘헝그리 정신’을 보고 ‘이런 선수가 있다면 계속 지도하고 싶다’고 마음을 고쳐먹었고 결국 교토국제고를 야구 명문으로 성장시켰다”라고 했다.
고시엔 구장엔 이날도 승리 팀 교가(校歌)를 트는 관례에 따라 교토국제고 교가가 흘러나왔다. “동해바다 건너서 야마도 땅”이라 시작하는 한국어 노래다. 일본 고교 야구를 상징하는 고시엔에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졌단 소식은 한국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이에 대해 박 전 교장은 “사실 내 임기 중 학교 이사진 등에서 교가를 (일본어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했다. 한국어 교가에 거부감을 가진 일부 우익 일본인들의 항의로 학생 안전이 우려됐던 탓이라고 한다. 하지만 박 전 교장과 교사진, 학생들이 나서서 뜯어말렸다. “(일본인 학생들은) 한국어가 좋아서, 한국 문화가 좋아서 온 아이들인데 (교가를) 바꾸는 건 말도 안 된다고 하더군요. 한국어 교가에 대한 학생들의 자부심은 엄청납니다.” 교토국제고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선 가장 먼저 교가를 가르친다. 학생들은 이를 외우고 평소 교정에서도 부르길 즐긴다고 한다. 박 전 교장은 “야구부원들은 훈련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갈 때마다 (교가를) 흥얼거린다”고 했다. 이번 대회에 출전한 학생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사상 첫 고시엔 결승이 확정된 다음 날 교토국제고 교원들은 이른 아침부터 출근해 다음 날 있을 결승 응원 준비에 주력했다. 박 전 교장 후임으로 올 4월 교토국제고 교장에 부임한 백승환(62) 전 오사카한국교육원 원장은 이날 본지 통화에서 “교토국제고의 결승 진출 소식에 ‘나도 경기장에 가 응원하고 싶다’는 연락이 많이 와서 교무실 전화가 쉴 새 없이 울렸다”라고 했다. 인근 주민들이 많았고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한국인도 있었다. “경기 표를 공수하고 이동 편 예약을 하느라고 아침부터 분주했어요. 학생들은 이미 축제 분위기지만, 우리(교직원)만큼은 선수들이 최대한 경기에 집중할 수 있게 침착히 뒷바라지해야죠.”
백 교장은 고시엔 결승 진출이 정말 기쁘지만, 교원들은 드러내기 어려운 ‘골칫거리’로 머리를 싸매고 있다고 했다. “경기를 준비하다 보면 경비가 많이 들어요. 숙소와 식사, 훈련 지원, 응원단 버스 대절 등 대부분 학교가 부담하거든요. 결승 진출은 좋은데 그만큼 돈이 많이 들어가게 되어서….” 그는 “학생들이 잘해준 덕분에 내일(23일 결승)까지 포함해 이번 대회에서 최소 3000만엔(약 2억8000만원)을 쓰게 됐다”고 했다. 재일 교포 단체 등에서 적잖은 돈을 지원해줬지만, 현재까지 들어온 후원금은 필요액의 절반 이하에 그친다.
백 교장은 “교토국제고의 활약 소식을 들은 주변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후원을 해서 힘을 얻고 있다. 1만~2만엔씩 ‘정성’을 담은 봉투가 하루에도 몇 번씩 학교에 건네진다”라고 했다. 학교 인근 상인회는 5만엔을 후원했고, 결승 진출을 기념하는 플래카드도 상가에 걸렸다. 백 교장은 “아직 더 많은 후원이 필요한 실정”이라고 했다. 부임 첫해 고시엔 결승 진출이란 ‘경사’를 맞은 기분을 묻자 백 교장은 “이 질문엔 답하지 않겠다. 결승이 끝난 이후로 좀 미뤄두고 싶다”고 했다.
교토 히가시야마구에 있는 교토국제고는 1947년 재일 교포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설립한 교토조선중학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99년 창단한 야구부가 명문으로 발돋움하고, 최근 K팝(한국 대중음악) 등 한국 문화에 관심 있는 학생들의 지원도 늘어나면서 현재 전교생 약 160명 중 절반 이상이 일본인이다. 학생들은 이 학교에 입학하면 주 3~4시간씩 한국어를 배운다. 한국어로만 진행되는 수업도 꽤 있다. 백 교장은 “올 4월 한국어능력시험에 응시한 학생 10여 명이 전원 합격증을 땄다”고 했다. 고마키 감독이 이끄는 교토국제고 야구부는 23일 오전 10시 도쿄 간토다이이치고와 고시엔 우승컵을 놓고 겨룬다.
☞고시엔(甲子園)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 있는 야구 구장 이름. 개장 연도가 육십갑자상 ‘갑자(甲子)년’인 1924년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매해 3월 ‘선발고교야구대회(마이니치신문 주최)’와 8월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아사히신문 주최)’가 열리는데, 이를 각각 ‘봄 고시엔’과 ‘여름 고시엔’이라고 통칭한다. 32교가 나오는 봄 고시엔에 비해 47도도부현(광역자치단체)별로 최소 한 학교씩 총 49교가 출전하는 여름 고시엔이 더 큰 행사로 꼽힌다.
※오늘(23일) 오전 10시 시작하는 교토국제고와 간토다이이치고의 여름 고시엔 결승전 생중계는 다음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vk.sportsbull.jp/kosh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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