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고토구 모리시타에 있는 한 수퍼마켓. 쌀 매대가 텅텅 비어 있다. 1990년대 이후 매년 쌀 소비량이 감소하던 일본이 최근 뜻밖의 ‘쌀 파동’을 겪고 있다. 공급 부족을 겪는 데다 쌀값도 크게 올랐다. /AFP 연합뉴스

지난 5일 일본 도쿄 북쪽의 사이타마현 아사카시(市)에 있는 수퍼마켓 올림픽아사카다이점. 쌀 코너에는 큰 글씨로 ‘쌀·현미 가족당 1포대씩 한정’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쌀 공급이 불안정해 물량이 부족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폐를 끼쳐 죄송하며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라는 설명이었다. 이바라키산(産)과 지바산 햅쌀(5㎏)은 각각 4102엔(약 3만7200원·세금 포함)과 3454엔이었다. 작년 같은 기간 1800엔 안팎이었던 이바라키산 햅쌀은 가격이 폭등해 2배 이상이 됐다.

같은 날 도쿄의 고급 주택가 아자부에 있는 수퍼마켓 내셔널아자부에는 ‘판매 제한’이 없었지만 가격은 훨씬 비쌌다. 니가타산과 구마모토산 햅쌀 가격은 각각 5180엔(약 4만7000원)이었다.

일본에서 ‘레이와(令和·2019년부터 사용 중인 천황의 연호) 쌀 파동’이 터졌다. 선진국이라는 일본에서 21세기에 쌀 부족에 따른 가격 급등과 판매 제한이라는 뜻밖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일본 쌀 도매가의 기준인 니가타산 고시히카리 60㎏ 한 포대는 7월 말 기준 2만7800엔~2만8300엔을 기록, 작년보다 90% 상승했다.

쌀 파동의 미스터리는 일본 내 쌀 소비량이 1996년 944t에서 2022년 691t으로 매년 감소하는 가운데 터졌다는 점이다. 혼란 속에 오자토 야스히로 농림수산상(장관)은 기자회견을 열고 “쌀 소동의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겠다”고 말했다.

쌀 파동이 터진 직후만 해도 일본 언론은 ‘해외 관광객의 일본 쌀 소비 급증’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공영방송 NHK는 “쌀 부족 현상은 해외 관광객의 유입으로 초밥 등 쌀 음식의 수요가 늘어난 데 일부 기인한다”고 했다. 올 상반기 일본을 방문한 해외 관광객은 1780만명이며, 7월엔 330만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하지만 정부가 여론의 화살을 다른 데로 돌리려 한다는 반론이 금세 등장했다. 일본의 쌀 소비량은 연간 약 700만t인데, 해외 관광객 증가로 늘어난 소비량은 최대 약 3만t으로 추정된다. 전체의 0.5%도 안 되는 적은 양이 수요·공급이 무너진 주요 원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일본의 쌀 생산량은 전년(670만t)보다 9만t 감소한 661만t인 데 반해 소비량은 전년보다 11만t 늘어난 702만t이었다.

그래픽=김성규

해외 관광객 유입에 따른 증가분(3만t)을 제외한 나머지가 일본인의 쌀 구매 증가에 따른 것이다. 작년부터 물가 상승 탓에 빵과 같은 식품 가격이 오르자 상대적으로 값싼 쌀 소비가 늘었고, 올 1월 노토 반도 지진이 터진 데 이어 8월 난카이 대지진 경고가 나오자 가정에서 재해에 대비해 쌀 구입을 늘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20만~40만t 규모의 공급 차질이 발생했다 해도 세계 3~4위권인 일본의 경제력으로 충분히 메꿀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 정부가 보유한 100만t 규모의 비축미 가운데 일부만 시장에 내놔도 쌀 부족은 당장 해결될 일이지만, 정부는 끝까지 거부하고 있다. 지난 8월 말 오사카부(府) 요시무라 히로후미 지사가 “중앙정부가 비축미를 풀어달라”고 공식 요청했지만 농림수산성은 “비축미는 현격한 흉작이나 2년 연속 흉작과 같은 긴급사태에 대비한 것”이라며 거절했다. 비축미는 5년이 지나면 사료용으로 헐값에 팔리는데도 정부는 완강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쌀값 인상을 은근히 바라 온 농림수산성의 속내가 드러났다는 평가도 있다. 농림수산성은 매년 농가에 3500억엔(약 3조1700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해 연간 20만t씩 쌀 생산량을 줄이는 정책을 펴왔다. 쌀농사 면적을 줄이고 다른 작물을 심으면 보조금을 주는 방식이다. 수요에 따라 생산량을 자율적으로 조정하지 않고, 쌀값 폭락을 막기 위해 의도적인 감산을 진행한 셈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농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농림수산성 입장에선 쌀 가격은 비쌀수록 좋다는 게 혼네(진짜 속마음)”라며 “수요에 따른 쌀 공급의 유연성은 사라졌고, 농가도 쌀 생산 의욕이 꺾였다”고 분석했다.

농림수산성은 공식적으로 “조만간 쌀 파동은 끝날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달 말부터 홋카이도에서 쌀 수확이 본격화되기 때문이다. 홋카이도는 작년 쌀 생산량 54만t으로, 니가타현(59만t)에 이은 일본 2위 지역이다. 일본 쌀 도매 물량의 절반 정도를 유통하는 JA그룹(전국농업협동조합)의 야마노 도루 회장은 쌀 파동 와중에 기자 회견을 열고 “쌀 생산 비용 증가분을 판매 가격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 언론들은 “쌀 파동이 끝나더라도 쌀값이 예년 수준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으며, 10~20% 오른 수준에서 자리 잡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5일 일본 사이타마현 아사카시의 슈퍼마켓 올림픽아사카다이점에서 '쌀은 한 가족당 한 포대 제한'이라는 알림을 써붙여놓은 모습.
5일 일본 사이타마현 아사카시에 있는 슈퍼마켓 올림픽아사카다이점 쌀 코너의 모습. 이바라키산 햅쌀이 작년보다 2배 이상 오른 4102엔에 판매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