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현대적이고 안전하고 깨끗해 보입니다. 그래서 일본·일본인에겐 ‘획기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설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일본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어쩌면 과거의 성공일지 모릅니다.”
‘피크 재팬(Peak Japan): 마지막 정점을 찍은 일본’의 저자 브래드 글로서먼은 최근 일본 도쿄에서 본지와 만나 “일본은 이제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알아내기 어려운 국가가 됐다”며 “한국엔 아직 역동성이 남아 있다. 한국이 일본의 실수를 배워 같은 길을 따르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2019년 일본에서 나온 책 ‘피크 재팬’(한국어판은 2020년 출간)은 미국 출신 글로서먼이 1990년대부터 도쿄에서 기자·연구자로 살면서 수집한 인터뷰와 자료를 토대로 했다. 한때 세계 2위 경제 대국이었던 일본이 1990년대 자산 거품 붕괴,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같은 안팎의 큰 충격을 받으면서도 변화·적응하지 못하는 원인을 분석한 책이다. 경제·인구·사회구조가 일본을 닮아간다는 한국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도 적지 않다.
日, 변해야 한다는 위기감조차 없어
-일본은 왜 변화를 멈췄을까.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이라는 기나긴 정체를 거치면서도 변화하지 못했다. 세계는 빠르게 변하는데 일본은 그저 기존의 궤도에 머무르기만 하니 결국 뒤처졌다. 일본의 가장 큰 문제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위기감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도쿄에 살다 보면 안다. 일본은 (높은 평가를 받은) ‘미슐랭 스타’ 식당이 수두룩한 효율적이고 살기 좋고 안전한 나라다. 이런 현실이 ‘이대로 만족한다’는 일본인의 사고방식과 태도를 만들어낸 측면이 있다. 이 책을 낸 후에도 ‘우리(일본인)가 왜 변해야 하죠’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일본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우선, 일본을 ‘실패한 나라’라고 부르긴 조심스럽다. 틀림없이 (한때) 성공은 했지만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국가라고 표현하고 싶다. 과거의 성공은 사실 쉬웠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을 바라보고 자동차·철강과 같은 산업을 모방하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한국도 비슷하지 않았나. ‘해야 할 일’에 대한 명확한 지표가 있었다. 자동차·철강 분야는 미국을 이기기도 했다. 그런데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을 찾지 못했다. 제대로 고민하지도 않았고 ‘20세기식 방식’을 지속했다.”
글로서먼은 “20세기의 성공 이후 일본은 어려운 변화보단 안주(安住)를 택했다.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으면 도전을 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세계 경제가 디지털 위주로 재편될 때 일본이 위기감조차 느끼지 않고 뒤처져 ‘갈라파고스’ 신세가 된 일을 사례로 들었다. 그는 “21세기 디지털 경제와 20세기 아날로그 시스템 사이엔 큰 간극이 존재한다. 일본은 이에 제대로 대처하기보다는 현실을 인정만 해버리고 말았다”고 했다. 그 원인 중 하나로 “정치·경제가 모두 과거의 기득권에 사로잡혀 버렸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정치도 일본 쇠퇴의 원인이란 뜻인가.
“최근 일본 정치는 줄곧 자민당이 장악해 왔다.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자민당이 교훈을 얻지 못하고 오만해지는 것’을 최악의 상황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일본 경제의 부흥을 꿈꿨지만 기득권 정치인이었던)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퇴임 후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십이 등장하기는커녕 낡은 정치가 다시 돌아왔다. 일본은 인구 감소와 국가 부채 증가, 방위비 부담, 고령자 문제 등 실질적인 위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직면했다. 이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강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고령자 증가, 인구 감소 등의 문제는 오랫동안 진행되지 않았나. 일본은 왜 이를 해결하지 못했나.
“일본에서 처음으로 인구 감소 경고가 나온 것은 1970년대다. 이후 한동안 일본은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뒤늦게 노인 복지, 저출산 대책 등 (인구문제로 인한) 지출을 계속 늘리는 가운데 정부가 세금을 올리지 않으니 국가 부채까지 가파르게 늘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이 200%를 넘어 지금도 계속 증가한다. 일본 경제학자들에게 물었더니 ‘빚을 못 갚게 되기 전까지 계속 국가 부채를 늘려도 된다’고 하던데, 어느 순간 일본이 빚을 갚지 못하는 ‘도산’의 시점이 올 수 있다고 본다. 그게 내일일지도 모른다.”
일본 증시 활황, 실물경제와 괴리
-일본 증시는 그래도 활황이다. 재(再)성장의 시그널 아닐까.
“닛케이평균(일본 대표 주가지수)이 일본의 미래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주식시장은 때론 실제 경제와 단절된다. 지금 주식시장에서 돈을 버는 이들은 엔저(低) 기회를 포착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대부분이다.”
-한국도 일본처럼 ‘정점’을 지나 쇠퇴할 가능성이 있을까.
“한국은 고립된 일본보다는 훨씬 국제화됐다. 한국인은 여전히 세계시장에서 경쟁하고 앞을 내다보며, 다른 나라의 모델에서 배우려고 한다. 특히 한국의 젊은이들은 훨씬 국제적이다. 한국에 정치 스캔들이 많을지는 몰라도 중국·일본과 달리 정권 교체가 자주 되고 권력의 오만이 덜하다는 점도 상대적 강점이다.”
인구 감소 한국, 잠재적 해법은 통일
-저출산 등 인구문제는 한국이 최근 더 심각한데.
“한국도 분명히 인구학적인 문제가 있지만 일본은 못 가진 잠재적 해결책이 있다. 북한과의 통일이다. 김정은 정권이 옛 소련처럼 갑자기 붕괴한다면 2500만명의 새로운 시민을 확보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먼 미래의 가정(假定)이다. 역시 핵심적인 해법은 여성들이 가족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지를 늘려주는 것이다. 주부, 워킹 맘(자녀가 있는 취업자), 전문직 종사자 등 여성이 어떤 선택을 하든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회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한국의 문제는 무엇일까.
“한국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나라’라는 인식, 즉 국제 무대에서 한국이 약하고 주체성이 약하다는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이 적어도 대부분의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큰 힘과 많은 자원을 가진, ‘돌고래’ 같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혁신을 장려하기 위해, 기업인에게 과도한 처벌 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할 기회를 더 열어줄 필요가 있다. 영화·음악 등의 분야에서 엄청난 창의성을 발휘 중인 한국 문화의 역동성이 대부분 재벌·대기업의 틀 안에서 나온다는 점도 문제다. 더 많은 스타트업(신생 기업)이 활동할 필요가 있다.”
☞브래드 글로서먼과 피크 재팬
브래드 글로서먼(Brad Glosserman)은 미국의 동아시아 분석가다. 1991년 마이니치신문 기자로 일하며 일본에 체류하기 시작해 이후 일본을 연구·분석해온 일본통이다.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전략국제연구소(CSIS) 퍼시픽 포럼에서 16년간 근무하며 연구 책임자와 선임 고문을 역임했다. 일본 다마대 룰형성전략연구소(CRS) 부소장과 객원교수로도 일했다.
’피크 재팬(Peak Japan) : 마지막 정점을 찍은 일본’은 한때 전 세계 부(富)의 16%를 차지했지만 정점을 찍고 쇠락하는 일본의 정치·경제·사회를 분석한 책이다. 일본 특유의 정치 리더십과 자본주의 메커니즘, 조직화된 기득권은 과거에는 일본 발전의 원동력이었지만 지금은 발목을 잡는 요인이라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