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낮 12시 일본 도쿄의 헌책방 거리 진보초에 있는 라멘(일본식 라면)집 후쿠마스. 점심시간인데도 대기 줄이 없었다. 가게 안에 군데군데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입간판 메뉴엔 800엔(약 7350원)이었던 라멘 가격 위에 스티커로 ‘900엔’을 덧붙였다. 가게 입구에 큰 글씨로 “라멘 주문한 분은 생맥주·하이볼·레몬사와(레몬 소주) 한 잔 300엔, 이 지역 최저가”라고 쓰여 있었다.
같은 시각 길 건너 라멘집 뉴토모친에는 10여 명이 늘어섰다. 비결은 라멘 가격이 750엔이고 밥이 공짜라는 점이었다. 150엔 차이가 두 가게의 희비를 가른 것이다. 뉴토모친은 손님이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선 채로 음식을 먹는 다치구이(立食) 방식이다.
고물가에 신음하는 일본에서 ‘라멘 위기설(說)’이 나오고 있다. ‘1000엔의 벽’을 넘지 못하고 도산 위기에 내몰리는 라멘집이 속출하는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 서민 음식인 라멘은 ‘한 그릇 1000엔 이하’라는 불문율이 있다. 실제로 도쿄 통계연감에 따르면 라멘 평균 가격은 2000년 548엔에서 2023년 567엔으로 거의 오르지 않았다. 물가는 오르는데 음식 값은 그만큼 올리지 못하는 라멘집들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
7일 시장조사 업체 제국 데이터 뱅크는 지난해 도산한 기업형 라멘 체인이 72곳으로 집계됐다고 발표했다. 53건이었던 전년보다 약 30% 급증해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일본의 기업형 라멘 체인은 500~1000곳 정도로 추정된다. 라멘 체인 열 곳 중 한두 곳이 문을 닫은 셈이다. 이 통계에는 자영업자의 동네 라멘집 폐점은 잡히지 않아, 실제로는 훨씬 많은 라멘집이 위기에 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조사 업체가 기업형 라멘 체인 350곳의 실적(2023년)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적자’가 33.8%, ‘이익 감소’가 27.7%를 기록해 61.5%가 경영 악화 상태로 나타났다.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은 2020년(81%)에 이어 역대 둘째로 어려운 상황이다.
라멘의 위기는 일본인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2%대 물가 인상률 탓이 크다. 라멘 재료 원가는 최근 2년 사이 10~15% 정도 올랐다. 돼지고기는 지난해 한때 전년보다 40% 급등하기도 했다. 최저임금도 지난해 10월부터 시간당 1163엔(도쿄 기준)으로 전년보다 약 4.5% 올랐다. 600~800엔의 라멘 가격을 고수하면 적자를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1000엔 이상으로 올렸다간 “라멘마저”라는 고객들의 외면을 받을 수 있다. 일본 라멘 시장에선 100엔만 값을 올려도 옆집에 손님을 뺏길 위험이 크다. 실제로 진보초 사거리 반경 20m 안에만 라멘집이 6~7곳 있다.
일부 인기 라멘집이 1000엔의 벽을 깨는 사례도 등장했다. 도쿄 간다에 있는 산마로 도쿄점은 소금 라멘이 1300엔, 인기 프랜차이즈 하카타 라멘은 1100엔이다. 후지타의 쓰케멘(국물에 찍어먹는 라멘)도 1100엔이다. 한 시간 줄을 서야 먹을 수 있는 인기 라멘집 라멘재지비트는 500엔짜리 ‘퍼스트 패스’를 판매한다. 줄을 서지 않고 곧장 입장하는 데 추가로 500엔을 내라는 것이다.
동네 라멘집엔 꿈같은 이야기다. 제국 데이터 뱅크는 “라멘은 가격을 1000엔 이상으로 하면 손님의 발길이 끊기는 경향이 강하다”며 “올해는 중소 라멘집을 중심으로 도산이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소비자들도 라멘 한 그릇 마음 놓고 사 먹기 어려운 상황이다. 라멘뿐 아니라 대부분 식재료 가격이 올라 식비 부담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일본 3인 가족 식비는 지난해 8월 평균 9만3130엔을 기록해 3년 전보다 16% 증가했다. 식비 지출이 늘어나는 12월을 제외하면 역대 최고치다. 2년 전과 비교하면 감자(53%), 오이(39%), 상추(34%) 등 대부분 식재료가 10% 이상 올랐다. 생계비 중 식료품 지출 비율을 뜻하는 엥겔 지수는 30.4%로 42년 만에 최고치다. 한국의 엥겔 지수는 12.8%(2021년)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가구당 소고기 구매량(2024년 8월)은 전년보다 6%, 돼지고기는 2% 감소할 정도로 소비자들은 절약하고 있다”며 “이렇게 높은 엥겔 지수가 지속되면 오락이나 내구재 지출을 삭감할 수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경제 여러 분야에 악순환이 올 수 있다는 의미다. 라멘의 위기는 라멘집만의 위기가 아니라 취약해진 일본 가계 전체의 위기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