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12일(현지 시각) 쇼핑몰·상점을 약탈하고 방화를 일삼는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 현지의 LG전자 공장이 약탈당하고 생산 시설이 전소하기도 했다. 경찰이 폭도를 진압하지 못해 치안 부재 상황으로 치닫자 남아공 정부는 군 병력을 긴급 배치했다. 이번 폭동은 부패 혐의로 조사를 받던 제이컵 주마 전 대통령이 수감되자 그의 지지자들이 반발해 지난 9일 시위를 벌인 것이 시발점이었다. 이후 나흘간 시위가 격화한 끝에 폭동으로 번졌다.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은 이날 TV로 중계된 연설에서 “우리 민주주의 역사상 보기 드문 폭력 행위로 최소 10명이 숨지고 490명 이상이 체포됐다”며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약탈과 절도는 혼란을 부추기는 기회주의적 범죄”라고 말했다.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주마 전 대통령의 고향인 동부 콰줄루나탈주에서 시작된 폭동은 남아공 최대 도시 요하네스버그가 있는 하우텡주로 확산됐다. 현지 방송과 소셜미디어 영상을 보면 몽둥이를 든 폭도가 상점을 습격해 진열장 물건을 닥치는 대로 가져갔다. 옷가지, 식료품, 전자제품을 약탈하는가 하면 냉장고를 훔쳐 등에 이고 가는 사람도 보였다. 콰줄루나탈주 최대 도시 피터마리츠버그에서는 한 대형 쇼핑몰이 화염에 휩싸였다. 길거리 차량 수십 대가 불에 타 전소했다.
요하네스버그에서는 시위대가 시내 중심부에 바리케이드를 쳐서 버스·철도 등 대중교통 운행을 일부 중단시켰다. 상당수 사업장이 문을 열지 않아 경제 활동도 사실상 중단된 상황이다. 남아공 국방부는 이날 성명을 내고 “소요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하우텡주와 콰줄루나탈주에 병력을 배치했다”고 밝혔다.
이번 사태로 콰줄루나탈주의 항구도시 더반의 산업단지에 있는 LG전자 공장이 큰 피해를 봤다. 주남아공 한국 대사관은 홈페이지에 공지를 올려 이날 새벽 1시 신원을 알 수 없는 90여 명이 공장에 침입해 물건 등을 약탈해갔고, 새벽 2시에 120명이 다시 침입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전자제품과 각종 장비, 자재를 훔쳐 갔다. 이날 오후에는 방화로 생산 시설과 물류 창고가 모두 불탔다고 LG 측은 밝혔다. 현지 방송을 보면 LG전자 공장 위로 화염과 검정 연기가 치솟았다. 2011년 설립돼 약 100명이 근무하는 이 공장은 TV·모니터 등을 생산해왔다. LG전자는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수십억원 규모의 피해를 당했다고 밝혔다. 주남아공 한국 대사관은 교민들에게 “불필요한 외출을 최대한 자제하고 신변 안전에 각별히 유의해달라”고 당부했다. 외교부에 따르면 남아공의 한국 교민은 3300여 명이다.
이번 사태는 라마포사 현 대통령에게 반감이 큰 주마 전 대통령의 열혈 지지자들이 주도했다. 2009년부터 2018년까지 재임한 주마 전 대통령은 재임 때부터 숱한 부패 혐의를 받았다. 특히 인도에서 넘어온 재벌 가문인 굽타 일가에서 거액을 받고 편의를 봐줬다는 의혹이 크게 불거졌다. 이로 인해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확산하자 2018년 사임했다. 이후 주마 전 대통령의 부패 혐의를 조사하는 독립적인 조사위원회가 출범했지만 주마는 조사위 출석을 계속 거부했다. 결국 남아공 헌법재판소가 지난달 29일 법정 모독 혐의로 주마에게 징역 15개월형을 선고하며 감금할 것을 명령하자 그는 지난 7일 경찰에 자진 출석해 수감됐다. 이에 대해 주마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정치 보복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주마 전 대통령과 라마포사 현 대통령 모두 민주화의 아버지라는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이끌었던 여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소속이다. ANC는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1994년 이후 27년째 집권 중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부 다툼이 심각해지고 있다. 주마가 대통령에서 물러나자 부통령이었던 라마포사가 대통령이 됐다. 이후 라마포사가 부패 척결을 내세우자 주마 지지자들은 “주마를 겨냥하는 정치적 마녀사냥”이라며 반발했다. 주마는 고향 콰줄루나탈주에서 아직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독일 도이체벨레가 보도했다.
이번 폭동은 경기 침체와 코로나 봉쇄령이 장기화되고 있는 데 따른 불만이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올해 1분기 남아공 실업률은 32.6%에 달하며 청년 실업률은 46.3%를 기록했다. 남아공은 이달 들어 하루 코로나 확진자가 2만명 안팎에 이르고 있지만 국민 5900만명 중 한 차례라도 백신을 맞은 비율이 6.4%에 그치고 있다. 이에 따라 오후 9시∼오전 4시 사이 통행금지, 주류 판매 금지, 식당 내부 영업 금지 등 강도 높은 봉쇄 조치가 시행되고 있다. 일부 시위대는 백신 접종 센터를 습격해 내부 시설을 파괴했다고 BBC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