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국·일본 등 아프가니스탄 주재 17개 대사관·대표부가 19일 무장 단체 탈레반을 향해 영어와 현지어로 공동성명을 냈다. 탈레반의 민간인 살상과 기반 시설 파괴를 비난하고 중단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이해관계가 다른 여러 나라가 이런 공동성명을 낼 정도로 탈레반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탈레반은 최근 수도 카불에서 서쪽으로 150㎞ 떨어진 도시 가즈니 인근까지 진출했다.
미국 정부는 같은 날 아프간 전쟁 기간 중 통역사, 안내원 등으로 미국에 협력한 현지인과 가족 등 2500여 명을 버지니아주 포트 리 미군기지로 실어 나르는 ‘동맹 난민 작전' 계획을 발표했다. 이들은 탈레반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이민 비자 발급을 강력히 요청해왔다.
20년간 주둔했던 미군의 완전 철군 시한(8월 31일)이 40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아프간이 이슬람 근본주의가 지배하는 엄혹했던 시대로 돌아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커지고 있다.
2001년 9·11 테러를 계기로 아프간 전쟁을 시작한 미군 주도 연합군은 그해 11월 탈레반을 축출했다. 아프간은 과도정부를 거쳐 2004년 친서방 민주정부를 수립했다.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규모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1년에는 10만명까지 늘어났다. 미군은 아프간 군·경을 훈련시키고 탈레반 장악 지역을 집중 공습하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현지 지형에 능한 탈레반의 거센 저항이 계속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미국에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2001년 개전 이래 아프간에서는 미군 2300여 명이 전사했고, 2만여 명이 부상했다. 아프간전에 2조4000억달러(약 2758조원)를 쏟아부었지만 부정적인 전망이 더 커지자 미국 내에서 ‘가장 오래 싸운 전쟁' 을 중단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져 왔다.
결국 지난해 2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행정부가 탈레반과 직접 평화 협정을 체결하며 발을 빼기 시작했다. 정권 교체로 올해 출범한 조 바이든 민주당 행정부는 철군 계획을 더 가속화했다. 9월 이후에는 미 대사관을 경비할 최소한의 병력만 남게 된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현재의 아프간 상황을 1975년 4월 사이공이 함락되던 베트남전의 마지막과 비교하면서 “수십 년 시차를 두고 벌어진 두 사건의 유사점이 두드러진다”고 했다. 우선 미군이 현지의 동맹을 배제하고 적군과 직접 협상을 통해 일방적으로 철군을 결정했다는 점이 닮았다. 미 대통령들이 국내 여론을 의식해 국제사회 우려 속에 철군을 강행한 점도 비슷하다.
아프간 정부의 분열과 군 사기 저하도 유사점으로 꼽혔다. NYT는 “1974년 12월까지만 해도 남베트남은 전쟁에서 상당 부분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이후 의회의 예산 삭감 등으로 탄환과 연료 공급이 급감하면서 공산군에게 밀렸다”며 “이는 현재 아프간 정부군 처지와 아주 비슷하다”고 했다.
미군 철수가 90% 이상 완료되면서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은 더욱 속도가 붙고 있다. 아프간전 전황을 분석하는 미 민주주의수호재단 롱워저널에 따르면 20일 현재 아프간 407개 행정구역 중 탈레반이 장악한 곳은 222곳으로 정부(73)보다 세 배가 많다. 롱워저널은 “지난 4월 조 바이든 대통령이 미군 완전 철수를 발표한 뒤 탈레반 점령지가 3배로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기세가 오른 탈레반은 이제 수권 세력으로 공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은 지난 17~18일 카타르 도하에서 권력 분점을 위한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히바툴라 아쿤드자다 탈레반 최고 지도자는 “우리는 이슬람 체제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탈레반이 정권을 잡을 경우 아프간 여성들에게 다시 족쇄가 채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 13일(현지 시각)에는 미국 CNN방송이 탈레반 대원들이 교전 중 비무장 상태로 붙잡힌 정부군 특공대원 22명에게 총기를 마구 쏴 살해하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을 공개했다.
미군이 빠져나간 아프간이 다른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러시아는 다음 달 초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아프간 접경 지역의 타지키스탄 군 기지에서 탈레반 침공에 대비한 합동군사훈련을 갖기로 했다고 현지 언론들이 전했다. 터키는 수도 카불 공항에 관심을 갖고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최근 바이든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공항 운영을 맡겠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