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북쪽으로 125㎞ 떨어진 판지시르의 한 지역에서 반(反) 탈레반 세력의 아프간인이 군용 차량 앞에 서 있다. 무기가 장착된 군용 차량에는 탈레반이 사용을 금지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AFP 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을 20년 만에 재장악한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은 보복은 없을 것이라는 당초 공언과 달리 주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며 각지에서 사상자 발생 소식이 잇따르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탈레반의 폭주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상황에서 수도 카불 북쪽 2주(州)인 판지시르와 파르완이 탈레반에 맞설 저항 세력의 최후 거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수도 카불 북부를 둘러싸고 있는 두 지역은 아프가니스탄 34주 중에 아직 탈레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은 곳으로 분류된다.

미 민주주의수호재단의 아프간 전황 분석 사이트 롱 워 저널은 20일 “판지시르는 탈레반이 주도(州都)를 무너뜨리지 못한 유일한 지역으로 판지시르를 거점으로 한 반(反)탈레반 세력이 인접한 파르완으로 세력 확대를 시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판지시르는 페르시아어로 ‘다섯 사자’라는 뜻이다.

판지시르·파르완은 수도 카불과의 거리가 60~100㎞ 내 있지만 험준한 산악 지대여서 군사작전이 쉽지 않다. 이 때문에 1980년대 소련 침공과 1990년대 탈레반 발호 때도 외부 침공을 물리쳤다. 판지시르 지역에는 상당량의 무기와 탄약, 차량과 연료 등이 비축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5일 카불 함락 직후 반탈레반 세력이 공개한 사진. 판지시르주의 비공개 장소에서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사진 아래 그의 아들 아흐마드 마수드(왼쪽)와 암룰라 살레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프랑스24 화면캡처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반탈레반의 상징적 인물 2명이 움직이고 있다. 기존 아프간 정부에서 부통령과 국가보안국장을 맡았던 암룰라 살레는 카불 함락 직후 반탈레반 저항을 선언하고 판지시르로 이동했다. 그는 함락 당일인 15일 트위터에 “나는 절대로 테러리스트 탈레반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영웅이자 지휘관, 전설이자 영도자인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영혼과 유산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썼다.

그가 언급한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1980년대 공산 세력을 물리치고, 1990년대에는 탈레반과 맞서다 2001년 9·11 테러 직전 알카에다에 피살된 국민 영웅이다. 살레는 이곳에서 도주한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 대신 헌법에 따라 자신이 대통령 권한 대행임을 선언하고 역시 대탈레반 저항을 선언한 마수드의 아들 아흐마드 마수드(32)와 힘을 합쳤다.

함락 당일 두 사람이 함께 앉은 장면이 외신에 공개됐고, 사흘 뒤에는 타지키스탄 주재 아프가니스탄 대사관 직원들이 현직 국가원수 사진 액자 자리에 살레의 사진을 걸어놓은 사진도 배포됐다. 이들을 중심으로 북부 지역의 군벌과 휘하의 병력 등 약 1만명이 모여든 가운데 소셜미디어 등을 활용한 여론전도 개시하는 양상이다.

최후의 저항 거점으로 떠오른 판지시르·파르완 주

앞서 탈레반이 1996년 세력을 잡았다가 5년 만에 축출된 것은 9·11 테러 직후 미국의 대대적 침공이 결정타였지만, 탈레반에 거세게 저항한 북부 지역의 군벌들을 확실히 제압하지 못한 것도 중요 원인으로 꼽힌다. 이미 살레-마수드가 이끄는 저항세력의 반격이 시작됐다는 현지 언론 보도도 나온다. 파키스탄 매체 우르두포인트는 18일 “판지시르의 저항세력이 파르완주 주도인 차히카르를 재탈환했고 핵심 보급로인 살랑 고개를 두고 탈레반과 싸우고 있다”며 “이곳까지 차지할 경우 저항세력은 외부 물자 보급을 위한 구명줄을 확보하게 된다”고 전했다.

민주주의수호재단의 빌 로지오 선임연구원은 “탈레반은 지금 450만 인구에 난민들까지 몰려든 카불의 치안을 유지해야 하는데 도시 서부에서 교전 소식이 계속 들려오고 있다”며 “탈레반은 카불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대원들을 그대로 둘지, 아니면 저항군 진압을 위해 파견해야 할지를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판지시르·파르완의 반탈레반 세력이 처한 환경이 과거보다 훨씬 악조건이라는 점이다. 아프간에 주둔했던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탈레반의 훼방으로 자국민과 협력자들을 본국으로 이송하는 데 커다란 차질을 빚고 있어 이들로부터 물자 지원은 기대하기 어렵다.

아프간에서 철군한 각국 군 고위 관계자들도 인터뷰 등을 통해 잇따라 “군사 지원 방식으로 아프간을 돕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프랑스 국제방송 프랑스24는 18일 “탈레반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아프간을 장악했고, 지난해부터 (미국과 진행한) 평화협정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존재를 인정받았다”며 “이런 일련의 상황 때문에 많은 전문가는 탈레반에 대한 저항이 불가능하거나 아주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