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중남미 경제규모 3위 국가 콜롬비아에서 대선 결선이 치러졌다. 이날 사상 처음으로 좌파 대통령에 당선된 구스타보 페트로(왼쪽) '역사적 조약' 후보가 수도 보고타의 당선 축하 행사장에서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당선인 프란시아 마르케스(40)와 함께 지지자들에게 손 들어 화답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중남미 우파의 최후의 보루로 여겨져 온 콜롬비아에서 사상 처음 좌파 정권이 들어서게 됐다. 우파 정권하에서 극심한 경제난이 계속되자 콜롬비아 국민들이 포퓰리스트 좌파를 대안으로 선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19일(현지 시각) 치러진 콜롬비아 대통령 결선 투표에서 좌파 연합인 ‘역사적 조약’의 후보 구스타보 페트로(62)가 50.4%를 득표해 당선됐다. 그와 맞붙은 중도 우파 대안 정당 ‘반부패 통치자 리그’의 부동산 재벌 출신 로돌포 에르난데스(77)는 47.3%를 얻었다.

지난달 29일 1차 투표에서 대대로 집권해온 기득권 우파 정당의 후보가 3위로 탈락하고, 페트로가 40%, 에르난데스가 28%를 각각 득표했다. 콜롬비아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1회로 제한하고 있어 이반 두케 현 대통령은 출마하지 못했다. 결선에선 보수 우파 유권자가 대거 에르난데스를 지지, 그간 여론 지지율이 박빙을 이뤄 승자를 점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현지 매체들과 로이터통신 등은 전했다. 이날 개표 초반은 에르난데스 후보가 소폭 앞서기도 했다.

승리가 확정된 후 페트로 당선인은 트위터에 “오늘은 콜롬비아 국민의 첫 승리를 축하하는 날”이라고 밝혔다. 당선 연설에선 “오늘부터 콜롬비아는 변한다. 다른 콜롬비아다”라고 선언했다. 페트로는 오는 8월 취임해 4년간 콜롬비아를 이끌게 된다.

19일 밤(현지 시각)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 중심가인 볼리바르 광장 앞에서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 당선인의 지지자들이 승리를 자축하며 기뻐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페트로 당선인은 1980년대 콜롬비아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하려 시도했던 반군 게릴라 전사 출신이다. 빈농의 아들인 그는 1970년 4·19 대선 부정 논란으로 생긴 좌익 민족주의 성향 게릴라 단체 ‘M-19′에 1977년 대학생이던 17세에 가입, 10여 년간 활동했다. M-19는 처음엔 부자를 약탈해 빈민가에 생필품을 나눠주는 활동을 하다가 요인 납치 살해와 대사관 점거 같은 무장 활동을 벌였다. 1980년엔 95명의 사망자를 낸 대법원 습격 사건을 일으켰다. 페트로는 정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소지한 혐의로 18개월형을 받고 복역했다. 이 같은 이력이 이번 대선에서 논란이 됐다.

M-19는 1990년 해체 뒤 제도권 정당이 됐다. 페트로도 경제학 석사 학위를 따고 유럽 유학을 한 뒤 연방 하원의원이 됐다. 이후 연방 상원의원을 거쳐 2012~2015년 수도 보고타의 시장을 지냈다. 그는 2010년과 2018년 대선에 도전, 세 번 만에 권좌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페트로는 이번에 연금 및 세금 개혁, 석탄·석유산업 비중 축소, 부자 증세, 복지 확대 등을 공약했다. 다만 첫 좌파 집권에 두려움을 느끼는 중도파 유권자를 설득하기 위해 주요 에너지 기업을 국유화하지 않기로 하고 중도 보수 성향 인사를 재무장관 후보로 낙점했다. 베네수엘라 같은 인근 좌파 정부보다는 미국 민주당 내 진보 그룹과 연대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페트로 당선인의 러닝메이트인 프란시아 마르케스(40)는 빈민가 미혼모 출신으로 콜롬비아의 첫 흑인 여성 부통령이 됐다. 열여섯 살에 아이를 출산하고 입주 가정부로 일한 경력이 있는 마르케스는 불법 채굴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콜롬비아의 환경·인권 운동을 이끌며 2018년 환경 분야 노벨상으로 불리는 ‘골드먼 환경상’을 받았다. 콜롬비아 인구에서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10%에 불과한데, 그녀는 흑인으로서는 최고위직에 오른 여성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이번 콜롬비아 대선에 이어 10월 중남미 최대국 브라질에서도 룰라 전 대통령의 귀환으로 좌파 재집권이 이뤄질 경우, 중남미 경제 규모 상위 6국인 브라질, 멕시코,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에 모두 좌파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이는 1999년 말부터 15년간 중남미 12국 중 10국에 좌파 정권이 들어섰던 '핑크 타이드'의 재현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콜롬비아는 수십 년간 중남미에서 미국의 가장 강력한 동맹으로, 이 지역 안보 정책의 초석이 돼왔다. 그러나 내부에선 친미 우파 기득권층의 부패와 무능에 대한 불만이 쌓여왔다. 현 이반 두케 정권에선 빈곤율과 실업률 상승, 치안 악화, 코로나 팬데믹 대응 실패로 민심이 악화하며 2019년과 2021년 두 차례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었다.

앞서 지난 2018년부터 멕시코와 아르헨티나, 페루, 칠레는 차례로 우파에서 좌파로 정권이 바뀌었다. 오는 10월 치러지는 중남미 최대국 브라질 대선에선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지지율이 열세인 가운데 좌파인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전 대통령의 귀환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경제 규모 면에서 중남미 상위 6국을 모두 좌파가 장악, 2000년대 이 대륙을 휩쓴 ‘핑크 타이드(pink tide)’가 재현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