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새벽 시리아를 가까스로 탈출한 시리아의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59)이 도주하는 러시아군 항공기에 태운 사람은 자신의 장남 하페즈(23)와 해외로 빼돌린 자산을 관리하는 측근 2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FT)가 20일 보도했다. 알-아사드는 전날 오후까지도 “러시아의 군사 개입이 곧 있으니, 항전하라”고 군 사령관들을 독려했고, 최측근들에게는 8일 대국민 연설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 탓에, 1970년 쿠데타로 집권한 그의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에 이어 54년간 알-아사드 일가의 독재를 도와 치부(致富)했던 충성 세력은 배신감에 사로잡혀 두바이와 레바논 등지로 탈출하고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그의 한 측근은 “도망가기 1시간 전까지도 ‘모든 것이 오케이’라고 말하고, 한밤중에 개처럼 도망갔다”고 말했다. FT와 월스트리트저널, 로이터 통신 등은 바샤르 알-아사드의 마지막 순간을 재구성했다.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전 대통령의 가족. 왼쪽부터 딸 자인, 아내 아스마, 장남 하페즈, 차남 카림. 이들은 모두 모스크바에서 재회했다./자료 사진

수도 다마스쿠스가 반군 세력에 함락되기 전날인 12월 7일 밤 늦게, 바샤르 알-아사드는 대통령궁 직원들에게는 “일과를 마치고 관저로 퇴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탄 것은 러시아군 장갑차량이었다. 모스크바국립대에서 물리학과 수학 박사학위 논문 심사 준비 중에 잠시 귀국했던 장남 하페즈와 함께 탔다. 몇 시간 전에 공원에서 친구들과 산책하던 하페즈는 저녁 식사 후에, 이 차량에 탔다.

밤 10시반쯤 총리 모하메드 잘랄리가 알-아사드에게 전화했다. 반군의 공격에 따른 거리의 공포 상황을 전했다. 알-아사드의 대답은 “(상황을) 내일 한번 봅시다”였다. 잘랄리는 “그가 내게 한 마지막 말은 ‘내일’ ‘내일’이 다였다”고 사우디 국영 알 아라비아 TV에 말했다. 다음날 알-아사드는 잘랄리 총리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알-아사드는 도주 수시간 전까지도 국방부에서 약 30명의 군ㆍ보안 지휘관들과 회의하며 “곧 러시아의 군사 지원이 있으니, 분전(奮戰)하라”고 독려했다. 자신의 오랜 정치ㆍ공보 고문인 부사이나 샤반 외무장관에겐 다음날 대국민 연설을 해야 하니, 관저로 오라고 했다. 샤반이 밤에 도착했을 때에는 아무도 없었다.

밤 11시쯤 알-아사드 부자(父子)를 태운 장갑차량은 시리아의 북서쪽 지중해에 연한 흐메이밈 러시아 공군기지로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알-아사드는 다마스쿠스를 벗어나고 나서야, 군에게 반군에 항복하고 주요 문서들을 소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의 오랜 추종 세력이 대통령궁을 찾아갔을 때에는 초소는 모두 비었고, 커피잔들은 반쯤 마신 채 놓여 있었다.

대통령궁에서 흐메이밈 공군 기지까지는 차로 2시간 남짓한 거리. 그러나 알-아사드와 장남은 8일 오전4시가 돼서야 러시아로부터 ‘난민’ 신분을 부여 받고 흐메이밈 공군기지를 떠날 수 있었다. 왜 지체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가 시작한 일가의 독재 정치가 54년 만에 끝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대통령의 연설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에 다음날 TV 앞에 앉았을 때에는, 그는 영원히 시리아를 빠져나갔다.

모스크바에서 알-아사드는 아내 아스마와 재회했다. 아스마는 급성골수성백혈병이 재발해서 이미 수주째 모스크바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모스크바엔 장인, 장모도 와 있었다. 아부다비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하던 딸 자인, 막내 아들 카림까지 모두 모스크바로 합류했다.

그게 다였다. 알-아사드는 시리아의 다른 처가 식구는 물론, 친동생과 사촌들, 24년간 충성했던 최측근들에게 말 한 마디 귀띔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아사드 부자가 탄 러시아 군용기의 다른 탑승객 중 두 사람은 확인됐다. 바로 해외로 빼돌린 알-아사드 일가의 자산을 관리하는 이들이었다.

알-아사드가 해외에 얼마나 많은 돈을 빼돌렸는지는 알 수 없다. 2022년 미 국무부 보고서는 “10억 달러에서 120억 달러 선”으로 추정했다. 시리아 전국민의 70%는 1일 1.9 달러 이하로 사는 빈곤 상태(2022년 세계은행 보고서)에 있다.

그러나 축출된 독재자들의 돈은 특히 러시아나 두바이 같은 곳에 은닉돼 있으면, 동결은커녕 포착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2011년 10월 반군에 붙잡혀 죽은 리바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일가가 빼돌린 돈은 430억 달러로 추정되지만, 지금까지 1200만 달러짜리 런던의 부동산과 몰타의 1억 달러 현금만 회수됐을 뿐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

도주하는 알-아사드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었지, 일가(一家)나 충성파 측근들의 안전이 아니었다. 친동생이자, 시리아의 정예 친위부대 제4 장갑사단 사령관인 마헤르에게도 자신의 도주 계획을 미리 알리지 않았다. 마헤르는 이후 이라크로 피신했다.

FT는 알-아사드에 빌붙어 살던 고위층 인사들은 이제 레바논과 중동 각지, 유럽으로 빠져나가 다음 행선지를 고민하고 있다. FT는 레바논 베이루트의 5성급 호텔인 인터콘티넨탈 페니키아 식당에서 루이비통 핸드백을 시리아 여성들이 서로 어떻게 탈출했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아이들은 두바이 국제학교에 등록할 것인지 작은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고 전했다.

여성 외무장관이자, 알-아사드의 정치ㆍ언론 고문으로서 ‘시리아 정권의 얼굴’로 불렸던 부사이나 샤반은 베이루트로 빠져나와 두바이로 옮겼다. 시리아군 수뇌부는 제각각 연줄을 찾아 러시아와 리비아로 옮겼다. 아사드 밑에서 정보기관 수장을 했던 알리 맘루크 등 일부 측근들과 가족은 러시아 대사관에 은신 중이라는 소문이 있다. 반군이 세운 시리아의 잠정 정부는 러시아에게 이들의 출국을 돕지 말라고 요청했다.

알-아사드는 도망가고도 거짓말을 했다. 그는 지난 17일 도주 후 처음 가진 인터뷰에서 “나의 시리아 출발은 전혀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며 “8일(일요일) 이른 시각까지도 다마스쿠스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거짓 주장을 했다.

그는 “반군 테러 세력이 다마스쿠스로 침투하면서, 나는 러시아 동맹군들과 함께 전투 작전상황을 살피기 위해 라타키아(주요 항구 도시)로 이동했고 아침에야 인근 흐메이밈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그랬다가 러시아 기지가 반군의 드론 공격을 받으면서, 러시아군 사령관이 이날 저녁 기지 철수를 결정했고, 이때 함께 이동하게 됐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