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백인 경찰의 진압에 의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으로 불거진 BLM(Black Lives Matter·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시위는 남북전쟁 시대 역사 유물들을 퇴출시키거나 학교 이름, 각종 행정 용어를 대대적으로 바꾸며 미국 사회에 강력한 여파를 남기고 있다.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다. 이 정치적 올바름의 파급력이 놀이동산 디즈니랜드 풍경까지 바꾸고 있다. 또 올해 개봉했거나 개봉을 앞두고 있는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블록버스터 영화들도 유색인종이 전면에 나선다.

미국 디즈니랜드와 디즈니월드가 올 연말 완성할 정글 크루즈 리모델링 개념도. 다양한 인종과 연령, 성별로 구성된 탐험대원들이 야생동물에게 쫓기고 있는데, 흰 수염을 기른 백인 남성이 코뿔소 뿔에 엉덩이를 찔리기 일보직전이다. /월트디즈니파크 공식 블로그

월트디즈니사가 백인 우월주의 시각이 두드러진다는 비판을 받았던 놀이기구들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디즈니는 지난달 25일(현지 시각) 캘리포니아 애너하임 디즈니랜드와 플로리다 올랜도 디즈니월드에서 운영중인 놀이시설 ‘정글 크루즈’를 올 연말까지 전면 개편하겠다고 발표했다. 정글 크루즈는 1955년 디즈니랜드가 들어섰을 때 생겨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는 터줏대감이다. 탑승객들이 정글 유람선을 타고 야생 동물들과 원시부족이 살고 있는 정글을 탐험하는 내용이다.

1955년 캘리포니아 디즈니랜드 개장때부터 운영돼온 정글 크루즈의 과거 모습을 담은 조감도. 백인 탐험대장이 흑인 일꾼들을 부리며 정글을 누비다 코뿔소와 하이에나에 쫓겨 나무로 올라갔다. 가장 아래에 있는 흑인이 코뿔소 뿔에 받히기 일보직전이다. 논란이 일면서 몇해전 백인 남성으로 교체됐다.

하지만 문명세상의 백인 탐험대가 아프리카와 아마존의 밀림으로 들어가 야만인들과 야생동물의 위협과 마주친다는 서사 구조가 백인우월주의 시선이라는 비판이 최근 조금씩 제기되다가 BLM운동을 계기로 증폭됐고, 디즈니는 결국 리모델링에 착수했다. 디즈니가 리모델링 계획으로 내놓은 시안 한 컷은 리모델링 방향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정글을 누비던 탐험대가 코뿔소와 하이에나에게 쫓겨서 나무 위로 올라가 있다. 코뿔소의 날카로운 뿔에 엉덩이를 찔리기 일보직전의 사람은 흰 턱수염을 기른 백인 남성이다. 그 위로 젊은 여성, 유색인종 남성 대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디즈니랜드 놀이기구를 영화로 만든 '정글 크루즈'의 공식 포스터. 올 여름 개봉예정으로 흑인-남태평양 원주민 혼혈인 드웨인 존슨이 주연을 맡았다. /디즈니 정글크루즈 인스타그램

탐험대원이 코뿔소에게 쫓겨 엉덩이를 찔리기 직전의 우스꽝스러운 장면은 원래부터 있었다. 하지만, 백인 남성 탐험대장이 나무의 맨 위에 올라가 있고, 그를 따르던 흑인 일꾼들이 줄줄이 아래로 매달려 벌벌 떠는 구도였다. 백인은 흑인의 상전이라는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이 일면서 디즈니는 맨 아래 위치한 사람을 백인으로 바꾸는 등 부분적으로 교체해왔고, 이번에 전면 리모델링을 하는 과정에서 덥수룩한 수염의 전형적인 백인 남성으로 다시 바꾸기로 한 것이다. 디즈니는 리모델링 계획을 발표하면서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다양성의 가치를 반영했다”며 백인우월주의 비판을 수용했음을 시사했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와 남미 정글에 사는 원주민들을 사람들을 야만적인 모습으로 표현한 기존 전시물들도 대폭 바뀔 전망이다.

다음달 개봉 예정인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동남아시아를 배경으로 용감한 소녀의 무용담을 그렸다. /디즈니 공식 인스타그램

앞서 또 하나의 오래된 탑승기구인 ‘스플래시 마운틴’도 인종 차별 논란에 휩싸이자 지난해 6월 개보수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후룸라이드와 비슷하게 통나무배를 타고 숲속을 둘러보는 이 놀이기구에선 흑인을 왜곡된 모습으로 그려냈다는 비판을 오랫동안 받았던 1930년대 만화영화 ‘남쪽의 노래(Song of the South)’ 주제곡이 흘러나오는데, 이 부분이 빠지고 2009년 개봉한 만화영화 ‘공주와 개구리’ 장면과 음악으로 대체된다. ‘공주와 개구리'는 뉴올리언즈 빈민가 출신 흑인 소녀가 ‘공주’로 나온 작품이다. 2018년에는 동명의 영화 시리즈로도 유명한 인기 놀이시설 ‘캐리비안의 해적'도 젊은 여성을 신붓감으로 경매에 부치는 장면도 혐오감을 조장한다는 논란이 일면서 빠지기도 했다.

흥행 질주 중인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 제작진이 골든글로브 최우수 장편 애니메이션 후보에 오른 것을 축하하면서 올린 인스타그램 게시물 /디즈니 공식 인스타그램

전세계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는 디즈니는 그동안 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각 분야에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배치하는 등 각 사업 분야에서 탈(脫) 백인남성흐름을 보여왔다. 올해 유색인종과 소수자 인권을 전면에 내세운 바이든 정권이 출범하면서 이런 흐름은 더욱 두드러지는 모양새다. 현재 국내 극장가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질주하고 있는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은 흑인 남성과 재즈 음악을 전면에 내세웠다. 다음달에 개봉예정인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동남아시아를 배경으로 용감한 소녀의 활약상을 다룬 영화다. 디즈니는 이번에 리모델링하기로 한 ‘정글 크루즈’를 아예 블록버스터 모험영화로도 만들었다. 원래 작년 개봉 예정이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개봉일정이 연기돼 올 여름쯤 전세계 극장가에서 볼 수 있을 예정이다. 주연은 할리우드 액션스타 드웨인 존슨. 그 역시 흑인과 남태평양 원주민 피를 물려받은 유색인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