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하게 아프고 더 이상 사회에 위협이 되지 않을 수감자가 풀려나 가택연금되는 것이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존 코널리가 제임스 벌저 및 다른 범죄자와 구축한 부패한 관계가 가져온 해악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한다. 다만 그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생을 마칠 수 있어야 한다는 범죄 희생자 유족들의 의견엔 동의한다” 지난 17일 미 연방 검찰이 발표한 성명이다. 연방 검찰이나 연방 수사국(FBI) 등 사법 기관의 공식 성명은 대개 범인 검거나 기소, 유죄 판결 등 수사의 성과를 알리거나, 조직에 헌신적인 공을 세운 수사관들이 퇴임하거나 불의의 사고로 희생됐을 때 바치는 헌사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처럼 짧은 문장안에 복잡한 감정이 묻어나는 경우는 드물다.
성명에 언급된 존 코널리는 FBI의 명예를 바닥까지 떨어뜨렸던 부패한 전직 수사관이고, 제임스 벌저는 그와 결탁했던 갱단 두목이다. 조폭 소탕을 위해 호랑이굴로 들어간 경찰이 결국 조직을 접수하게 되는 얘기를 다룬 한국 느와르 영화 ‘신세계’를 떠올리게도 하는 FBI와 조폭의 유착 스캔들이 다시금 회자되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가족들과 보내게 해달라며 코널리가 낸 석방 요청이 받아들여지면서다.
FBI수사관과 갱단 두목의 결탁은 40여년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메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40대 초반의 수사관 코널리와, 아일랜드계 갱단 두목 존 벌저가 커피숍에서 처음 악수를 나눴다. 두 사람은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했다. 1968년 수사관 생활을 시작해 볼티모어·샌프란시스코·뉴욕을 거쳐 전입온 코널리가 새 임지에서 순항하려면 보스턴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조폭들과의 정보 거래가 필요했다. 검찰이나 경찰, 수사관들에게 범죄 정보를 캐기 위해 현직 조폭들을 정보원으로 관리하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이탈리아계 마피아들 사이에서 입지를 다져야 하는 벌저 입장에서도 위급할 때 뒤를 봐줄 수 있는 FBI인맥은 천군만마였다. 깊어진 이렇게 두 사람의 밀월은 금도를 넘어섰다. 1981년 스포츠업체 월드 하이 알라이의 최고경영자인 존 칼라한과 현지 조폭과의 유착 의혹에 대해 FBI가 수사에 착수했으며, 칼라한이 조폭 일망타진에 관여할 계획이라는 핵심 정보를 알려준 것이다. 벌저는 이 갱단의 운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핵심 정보를 알아낸 벌저는 즉시 칼라한의 제거에 나섰다. 1982년 칼라한이 실종됐고, 대대적 수색 작업 끝에 마이애미 국제공항 주차장에 서있던 캐딜락 짐칸에서 총탄을 여러 번 맞은 부패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 건을 포함해 일대에서 벌어진 총격살인을 배후에서 명령한 주범으로 수사를 받던 벌저는 1994년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번에도 배후에는 코널리가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 분위기상 기소될 것 같다’는 귀띔에 종적을 감춘 것이다.
그동안 코널리의 수사관 생활은 평탄하게 흘러갔다. 50세이던 1990년 명예 퇴직한 뒤 에너지회사 보안 책임자로 자리를 옮기며 전직 수사관으로 강연과 수사 자문 활동 등을 하며 여유로운 전관 생활을 했다. 순조롭게 이어질 것 같았던 삶은 격랑에 휘둘리기 시작했다. 종적을 감춘 벌저에 대한 추적은 계속됐고, 1982년 칼라한의 잔혹한 살해 배경에 수사당국과의 유착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덮여있던 사건파일이 다시 열린 것이다.
코널리는 살해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2000년 기소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재판 과정에서 유착관계에 있었던 조폭들의 폭로가 잇따랐다. 수년간 거액의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내용, FBI 요원 평균 봉급으로 꿈도 꿀 수 없는 호화저택과 자동차, 요트를 구입해 백만장자처럼 살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그는 2년뒤에는 또 다른 사건에 연루돼 2급 살인 혐의로 주 법원에서 40년을 선고받았다.
갱단 두목 벌저의 도피생활도 파국을 맞았다. 성형까지 하며 잠행을 이어가다가 2011년 제보에 의해 캘리포니아주에서 전격 체포된 것이다. 벌저는 살인, 자금 세탁, 마약 밀매, 무기 소지 등 수십건의 혐의가 인정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정보를 주고받으며 공생하다 선을 넘었던 수사관과 갱단 두목이 모두 여생을 감방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이 영화 같은 이야기를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가만 놔둘리 없다. 실제 두 편의 영화(2006년 디파티드·2015년 블랙 매스)로 만들어졌다. 이 중 마틴 스코세지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디파티드는 그에게 첫 오스카 감독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두 사람의 말로는 극명하게 대비됐다. 뒤늦게 수감된 벌저는 89세이던 2018년 10월 동료 재소자들에게 폭행당해 감방에서 숨을 거뒀다. 처참한 말로였다. 반면 코널리는 뒤늦게 여생을 집에서 보낼 수 있게 됐다. 당뇨와 악성 종양에 시달려 1년 남짓 밖에 살 수 없다는 의학적 판정이 나오자 변호인을 통해 석방을 요청해 받아들여진 것이다. 단 호스피스 시설을 벗어날 수 없는 조건부 석방이다. 피살된 칼라한의 부인과 아들이 그의 석방에 동의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