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18일 별세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 후임 후보자를 25일이나 26일 지명하겠다고 21일(현지 시각) 밝혔다. 그는 이날 폭스TV 전화 인터뷰에서 “긴즈버그 대법관의 장례식이 24일이나 25일 치러질 예정이기 때문에, 긴즈버그에 대한 존중을 표하기 위해 장례식이 끝난 후 후보자를 발표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대법관 지명을 대선 이후로 미루라는 민주당 요구를 무시하고 대법관 후보 지명을 서둘러 강행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트럼프는 긴즈버그가 사망한 지 채 24시간이 지나지 않은 19일 “재능 있고 영민한 여성 대법관 후보가 아주 많다”며 “대선 TV 토론(29일) 전에 지명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지명 시점을 아예 긴즈버그 장례식 직후로 앞당기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면서 6주밖에 남지 않은 미국 대선판이 ‘연방대법관 지명’ 이슈로 달아오르고 있다.
트럼프가 대법관 인선을 강행하려는 것은 대법관 인준이 유권자의 큰 관심사여서 보수표 결집에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란 해석이 나왔다. 당초 코로나 대응 실패 등 자신에 대한 심판장으로 여겨졌던 이번 대선의 초점을 ‘대법관 인준 선거'로 급전환시키기 위한 측면이 크다는 것이다.
대선까지 남은 기간 동안 트럼프가 지명한 후보가 대법관으로 인준받기는 물리적으로 쉽지 않다. 대법관은 대통령의 후보자 지명 후 상원 사법위원회의 검증과 상원 인준청문회를 거친 뒤, 상원 투표까지 통과해야 한다. 보통 석 달 가량 걸릴 때가 많다. 자신이 재선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트럼프가 긴즈버그 후임 지명을 강행하는 것이 대선 전략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후보 선택도 정치적이다. 트럼프 측이 공개한 대법관 유력 후보는 낙태를 반대하는 7명 아이의 엄마, 쿠바 망명자 후손, 동성애를 반대하는 30대 후반 판사 등이다. 모두 대선 국면에서 보수층의 표심을 결집하거나, 트럼프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후보들이다. 특히 트럼프는 여성 유권자 지지율에서 바이든에게 밀리는데, 이번에 내세우는 여성 대법관이 민주당 부통령 후보 카멀라 해리스에 비견되는 ‘준(準)러닝메이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트럼프만 대법관 지명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도 올 초부터 “대통령이 되면 사상 첫 흑인 여성 대법관을 지명하겠다”고 했고, 20일 이 입장을 재확인했다. 다만 바이든은 “긴즈버그 후임은 11월 대선 승자가 지명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워 자신의 후보 리스트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날도 “내가 당선되면 트럼프의 지명은 철회돼야 한다”고 했다.
두 대통령 후보가 모두 새 대법관을 여성으로 못 박은 것은 대선을 앞둔 정치적 수싸움이다. 우선 긴즈버그가 여성 인권의 수호자로 유명했기 때문에 그 바통을 여성이 이어받아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다. 현 대법원 구성은 남성 6명, 여성 2명이다. 또 트럼프와 바이든 모두 70대 남성이라 ‘보완재’를 필요로 한다.
공화당은 특히 이번에 대법관 인준을 받는 데는 남성보다 여성이 안전하다고 여긴다. 보수 진영은 2018년 남성인 브렛 캐버노 대법관 인준 당시 그의 성추행 전력이 드러나 여성계로부터 맹폭을 당한 악몽이 있다.
그러나 공화당 내에서도 대선 전 대법관 후보 지명에 대한 반발이 터져 나오고 있다. 자신들이 2016년 대선을 10개월 앞뒀다는 이유로 오바마 정권의 진보 대법관 지명을 막은 전례가 있는데 이제 와 말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수전 콜린스, 리사 머카우스키 상원의원이 반대 의사를 밝힌 상태다. 만약 공화당에서 4명 이상 이탈표가 생기면 대선 전 대법관 지명은 무산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