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에너지기업 부리스마의 고위임원이 아들 헌터의 주선으로 "아버지 조 바이든 당시 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며 감사의 뜻으로 보낸 이메일.

"나는 우크라니아·중국·러시아로부터 돈 받지 않았지만, 조 바이든은 수백만 달러를 받았다. 당신 아들(헌터)이 10% 지분을 줘야 한다고 했던 '그 빅 맨(big man)이 당신이죠?” 지난 22일밤 (현지시간) 미 대선후보 3차 TV토론에서 트럼프는 자신의 과거 납세(納稅) 기록을 변호하다가, 불쑥 바이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수일 전부터 뉴욕포스트와 폭스뉴스 등 미국의 친(襯)트럼프 매체들은 미 해군 중위 출신의 투자가인 토니 보불린스키가 바이든의 아들 헌터, 바이든의 동생 제임스 바이든 등과 함께 2017년 중국화신에너지(CEFC)의 미국 투자 회사인 시노호크를 운영했고, 이 지분의 10%를 ‘빅 가이’ 바이든에게 주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시노호크의 CEO였던 보불린스키와 아들 바이든 사이에 오간 이메일에는 “짐(Jim ·제임스) 10%, H 20%, '빅 가이(big guy) 지분 10%는 H가 보유”이라고 돼 있다. 조 바이든이 미 부통령직에서 물러난 지 불과 수개월된 시점이었다. 보불린스키는 이날 TV 토론이 끝난 뒤, “H는 헌터, ‘빅 가이’는 조 바이든”이라며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자신의 스마트폰 3개를 미 연방수사국(FBI)에 제출했다.

뉴욕포스트는 지난 14일에도 우크라이나 에너지기업 ‘부리스마’의 고위 임원이 2015년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바이든을 만날 수 있었던 것과 관련해 아들 헌터에게 보냈다는 감사 이메일을 ‘폭로’했다. 당시 헌터는 이 기업의 이사로 재직하면서 매달 5만 달러를 받고 있었다. 이메일엔 “헌터씨, 워싱턴 DC로 우리를 초청해줘서 당신 아버지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영광이고 기쁨이었다”고 적혀 있었다.

2017년 부통령에서 내려온 조 바이든이 중국 민간에너지기업의 미국내 투자사 지분 10%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이메일 내용.

◇수리점에 맡긴 노트북 PC에서 쏟아져 나온 이메일

이 모든 이메일의 출발은 2019년 4월 한 사람이 델라웨어주 윌밍턴의 한 PC 수리점에 맡겼다는 노트북 PC에서 시작한다. 윌밍턴은 헌터의 아파트에서 가깝고 바이든 후보의 집이 있는 도시다. PC 수리기술자는 수리의뢰서를 쓰려고 그 사람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나 ‘헌터 바이든’이라고 밝힌 사람은 노트북을 찾아가지 않았고, 이 기술자는 복구한 외장 하드드라이브에서 “깜짝 놀랄만한 내용” 등이 포함된 1만1500통의 이메일과 수많은 사적인 사진들을 발견했다. 이 수리기술자는 나중에 FBI와 연방 상원의 조사에서 “헌터 바이든이 직접 노트북 PC를 맡겼다”고 증언했다. 수리의뢰서엔 헌터 바이든의 것으로 추정되는 서명도 있었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를 찍었던 그는 자신이 복구한 이메일의 내용에 놀라 연방수사국(FBI)에 이를 신고했으며, 자신도 복사했다. FBI가 당시 수리 기술자의 신고를 접수했고 컴퓨터와 드라이브를 압수해갔다는 사실은 뉴욕타임스와 폭스뉴스 등 여러 언론의 취재로 확인됐다.

◇이메일의 진위(眞僞)에 대해 입닫은 미 정보당국

트럼프가 올해초 우크라이나 정부에 ‘부리스마’와 헌터 부자(父子)의 부패 관계를 파헤치도록 압력을 가해 미 대선에서 바이든을 궁지에 몰려고 했다는 이유로 미 의회의 탄핵 대상에 올랐다. 그러나 그때에도 이 노트북의 존재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결국 트럼프 지지자인 이 PC 수리기술자는 미 의회의 공화당 의원들에게 ‘헌터 바이든 노트북’의 존재에 대해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FBI와 미 국가정보당국의 수장(首長) 존 래트클리프는 이들 이메일이 “러시아의 왜곡정보 공작은 아니다”고만 확인할 뿐, 이메일에 포함된 내용의 진실성과 노트북 PC 자체에 대해선 수사를 했는지조차 입을 다물고 있다. 결국 바이든 후보에 대한 의혹만 커지게 됐다.

2009년 부통령 취임 때, 아들 헌터와 함께 걸어가는 조 바이든./AFP 연합뉴스

아들 헌터는 한때 마약중독에 빠지고, 유부남이면서 죽은 형의 아내를 비롯한 여러 여성과 문란한 관계를 유지해 바이든 집안에선 골칫거리인 인물이었다. 조 바이든 진영은 아들 헌터가 CEFC의 미국 내 투자기업 ‘시노호크’에 투자했고, 과거 우크라이나 ‘부리스마’의 이사를 지낸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 바이든 후보는 아들의 사업은 전혀 관계가 없고, 부통령 재직 시 일정에도 부리스마 임원과 만났다는 기록도 없고 사실도 아니다”고 부인했다.

◇트럼프 진영, 애초 월스트리트저널에 자료 넘겼지만

뉴욕타임스는 25일 “이달 초 트럼프 선거본부의 변호사 3명이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워싱턴DC 지국장과 만나 관련 자료를 다 건네주고 취재를 부탁했다”고 보도했다. 이 자리엔, 조 바이든 후보가 중국 기업의 미 투자사 지분 10%를 갖고 있다고 폭로한 보불린스키도 스피커폰으로 합류했다. 정확한 보도로 정평이 난 보수 정론지인 WSJ는 반(反)트럼프 유권자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최적의 매체였다. 트럼프 진영은 3차 미 대선후보 3차 TV토론일인 22일 이전에 WSJ이 대대적으로 보도해 주길 기대했다. 트럼프로선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옥토버 서프라이즈’ 카드였다.

그러나 타이밍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WSJ는 중국기업과의 거래에 관련해 이메일에 언급된 사람들을 일일이 인터뷰하며 취재했지만, 끝내 '조 바이든이 미국을 팔아먹는 짓을 했다’ ‘조 바이든도 중국 투자기업 시노호크에 지분이 있다’는 결정적 ‘한방’을 찾을 수 없었다. ‘망나니 아들’ 헌터가 제 아버지 이름을 팔아 돈을 챙긴 또 다른 사례에 그칠 수 있었다. WSJ 편집국 간부들 사이에선 대선 막판에 트럼프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게 되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바이든이 중국 에너지기업의 미국내 투자사에서 10%의 지분을 확보했다는 내용을 폭로한 뉴욕포스트의 1면

WSJ이 미적거리자, 트럼프의 개인변호사인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은 같은 자료를 뉴욕시의 친(親)트럼프계 폭로 전문 신문인 뉴욕포스트로 넘겼고 뉴욕포스트는 지난 14일 이후 계속 커버스토리로 다루며 바이든을 공격하고 있다. 이후 폭스뉴스 TV와 현재 친(親)트럼프 인터넷 매체들은 연일 바이든 후보가 미국을 ‘배신’하고 적국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증거로 노트북의 이메일과 보불린스키의 기자회견 내용을 크게 보도한다. 그러나 친(親)민주당 계열인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CNN 등은 양측의 주장만 간단히 보도할 뿐, 바이든 후보가 아들 헌터의 이런 사업들에 실제로 얼마나 개입돼 있었는지에 대해 독자적인 탐사 보도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새롭게 사실로 분명히 드러난 것은 바이든 후보의 아들과 동생이 2017년 막 부통령직에서 내려온 조 바이든을 어떤 형태로든 ‘동원’해, 미국에서 친(親)중국 사업을 하려 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 ‘카드’를 어떻게든 계속 크게 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