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선보인 새 경제팀에서 ‘블랙록’이란 이름이 두드러지고 있다. 블랙록(Black Rock)은 뉴욕에 본부를 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다.

지난 1일 지명된 아데왈 아데예모(39) 재무부 부장관 후보는 오바마 정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국제 경제 담당 부보좌관을 거쳐 블랙록 래리 핑크(68) 회장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으로 내정된 브라이언 디스(42) 역시 오바마 백악관의 NEC 부위원장을 하다 블랙록 지속가능투자팀의 임원을 지내온 인물이다.

미 재무부 역사상 첫 흑인 부장관이 될 아데왈 아데예모 재무 부장관 지명자가 지난 1일 델라웨어주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 소개로 인사하고 있다. 그는 오바마 정부를 나와 자산운용사 블랙록 래리 핑크 회장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저작권자 ⓒ 1980-202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브라이언 디스가 오바마 정부 백악관 선임고문이던 지난 2015년 파리기후협약 협의차 파리를 방문한 모습. 이후 그는 자산운용사 블랙록 임원으로 지속 가능 투자 업무를 맡다가 이번에 바이든 백악관으로 돌아오게 됐다.

이를 두고 월스트리트저널은 2일(현지 시각) “월가와 백악관 간 회전문 인사의 중심이었던 골드만삭스의 시대가 가고 블랙록이 왔다”고 평했다. 124년 된 세계 최대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그간 미 정부 경제 브레인의 산실로 통했다. 트럼프 정부의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 게리 콘 전 NEC 위원장도 골드만삭스 출신이어서 ‘거버먼트(정부) 삭스’란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 이 지위를 설립 32년 된 신흥 강자 블랙록이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블랙록의 영향력은 골드만삭스를 능가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미 학계와 재계에선 블랙록이 미 행정·입법·사법부에 이은 ‘제4부(府)’가 될 수 있다거나, 미 정부 모토인 ‘우리는 신을 믿는다(In God We Trust)’가 ‘우리는 (블랙록 회장) 핑크를 믿는다’로 바뀔 판이란 말까지 나온다.

왜일까. 우선 오바마와 바이든 정부를 연결하는 경제·안보 핵심 인재풀을 블랙록이 관리하다시피 했다고 블룸버그 통신은 2일 보도했다. 블랙록의 정책연구소를 이끄는 토머스 도닐런(65) 전 NSC 보좌관은 이번에 중앙정보국(CIA) 국장으로 유력 검토됐으나 본인이 고사했다고 한다. 이외 마이크 파일 전 백악관 경제보좌관, 스탠리 피셔 전 연방준비제도 부의장, 셰릴 밀스 전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비서실장 등 10여 명이 블랙록 임원으로 재직 중이며, 언제든 바이든 정부 요직에 투입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

블랙록이 민주당과 친한 것은 환경, 인종·성 평등 같은 가치를 내세우기 때문이다. 래리 핑크 회장은 올 초 “앞으로 블랙록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 기준은 환경문제가 될 것”이라며 “석탄 산업 관련 투자를 중단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대규모 친환경·대체에너지 투자 정책을 내세운 바이든 정부의 최대 원군이 될 전망이다.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이 지난 2019년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기후변화 투자 관련 재계 회의를 마치고 나오고 있다. 그는 자산운용사로선 드물게 친환경 투자와 인종 평등, 성 평등 같은 진보적 가치를 내세워 오바마 정권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블랙록을 세계 최대 운용사로 키웠다. 핑크 회장 자신이 오바마 정부의 재무 장관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저작권자 ⓒ 1980-202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블랙록은 1988년 핑크와 동료 8명이 세운 회사다. 뉴욕 맨해튼의 작은 사무실에서 시작, 2000년대 중반 급성장했다. 골드만삭스처럼 수익 창출에 목숨을 건 공격적 인수합병 대신, ‘지속 가능성’ ‘기업의 책임’ 같은 명분을 내걸고 개인·기관의 돈을 모아 주식·채권에 분산 투자했다.

블랙록의 압도적 시장 지위는 이미 바이든 당선 전부터 재계를 쥐락펴락했다. 현재 블랙록이 전 세계에서 굴리는 자산 규모는 7조8000억달러(약 8530조원)로, 애플 등 세계 5대 기업을 살 수 있는 천문학적 액수다. 블랙록은 삼성전자의 3대 대주주이기도 하다.

블랙록의 존재는 시대가 변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월가와 미 정부의 끈끈한 관계는 이어진다는 불변의 공식을 입증한다. 그러나 민주당 내 진보 진영은 블랙록의 친환경·평등 기조는 규제 칼날을 피하기 위한 ‘이미지 세탁용’일 뿐, 또 다른 신흥 금융 권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디스의 NEC 위원장 내정설에 좌파 시위대가 블랙록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으며, 이 때문에 바이든 측의 공식 발표가 늦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